내가 일하는 약국 건물 지하에 40년 된 가정식 백반집이 있다. 주인 할아버지 부부의 연륜만큼이나 오래된 손때 묻은 식탁과 의자, 낡고 비좁은 공간이지만 손맛 좋은 이 식당은 점심시간이면 직장인들로 붐빈다.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50대 딸이 차리는 밥상은 밥과 된장국, 고등어조림에 뚝배기 계란찜, 멸치볶음과 시금치나물, 오징어젓갈 등 계절 따라 선보이는 메뉴로 주인의 정성과 진심이 담긴 집밥이다. 믿기지 않을 만큼 푸짐한 반찬들이 나오는데 어찌 된 셈인지 가격은 다른 식당들보다 천 원이나 싸다.

오전 네 시간의 고된 노동 중에도 이 밥을 먹는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그런데 인기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경영 철칙은 배달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점심을 먹으려면 누구든 예외 없이 긴 줄 끝에 서야 한다. 가장 바쁜 시간인 데다 따로 점심시간이 없는 우리는 빠르고 간편한 김밥, 햄버거, 컵라면으로 대강 점심을 때웠었는데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한 할아버지는 “그게 간식이지 워디 점심이여? 다 먹고자 하는 짓인디…… 사람 배 속에는 뜨뜻한 밥이 들어가야 하는겨!”라고 꾸짖으시더니 점심을 직접 배달해 주겠노라 폭탄(?) 선언을 하셨다.

그러나 뚝배기 찌개에다 3인분의 식사가 담긴 식판을 들고 엉금엉금 계단을 오르내리시는 할아버지에게 염치도 없고 안쓰러워서 사양을 했는데도 당신의 사명인 양 막무가내로 우리의 점심을 꼭꼭 챙기신다. 어쩌다 밥이라도 남기면 실망해서 즉각 심문(?)을 시작하신다. “반찬이 시원찮은겨? 맛이 없는겨?” 그러고는 주방의 할머니를 닦달한다. “내일은 참조기를 구워 올려야 혀!” 그러다 보니 날이 갈수록 반찬 수가 늘어나서 진수성찬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복도에 내놓은 식판이 자꾸 없어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여…… 어떤 놈인겨?” 갈수록 그 횟수가 늘어나자 점잖은 할아버지도 드디어 뿔이 났다. 그런데 내가 우연히 옥상에 올라갔던 그날, 범인을 잡았다. 물탱크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허겁지겁 뭔가를 먹고 있었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고층 빌딩 옥상에서 식사라니 이상했다. 그런데 남자 앞에 놓인 식판이 눈에 익었다.

언젠가부터 그 사나이는 항상 때가 꼬질꼬질하고 후줄근한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약국에 나타났다. 독기, 살기, 악기를 잔뜩 품은 30대 초반의 그는 눈빛이 섬뜩했다. 그 살벌한 기운에 눌려서 만 원을 갈취당하고 청심환까지 제공했다. 그걸 먹고 유유히 사라지는 뻔뻔한 행패에 나는 꼼짝없이 당하곤 했다. 경찰에 신고를 할까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저렇게 된 사연도 있을 것 같고 난동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얌전히 괴롭히니 나름대로 동정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 식판 도둑을 할아버지에게 신고(?)하자 밀린 숙제를 한 것처럼 후련했다. 틀림없이 할아버지가 혼찌검을 냈을 테고 앞으로 이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앓던 이가 쑥 빠진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 후, 사나이가 다시 약국에 나타났다.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청심환이요!” 하고 만 원짜리 지폐를 턱 내놓고는 쿨하게 사라졌다. 반전이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내 신고를 받고 부랴부랴 옥상으로 갔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평소 철학대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반찬 하나 남김없이 그릇들을 깨끗이 비운 그를 할아버지는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1년짜리 장기 식권을 손에 쥐어 주었다. 언제든지 와서 밥을 먹으라고.

그런데 지난 설 명절을 앞두고 할아버지는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영양제를 챙겨서 식당에 내려갔다. 그런데 저쪽에서 식탁을 깨끗이 치우고 행주질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 ‘새로 온 직원인가?’ 했다. “어서 오십시오!” 앞치마를 두르고 정중하게 인사하는데 낯이 익다. 식판 도둑, 바바리코트였던 것이다.

요즘 점심시간이면 다친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그가 우리의 점심을 배달한다. 무거운 식판을 들고 들어오는 그 표정이 순하고 신선하다. 예전의 독기, 살기, 악기는 온데간데없다. 고시 공부를 하다가 실패한 뒤로 노숙인이 되어 방황하다 할아버지의 식당에서 공짜밥을 먹게 되면서 알바를 자청했다. 그의 ‘인생 반전’이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일용할 한 끼 밥상’은, 밥상을 받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일깨워준다. 그 한 끼 밥상은 일상의 무게에 눌린 직장인들의 피로를 풀어 줄 뿐만 아니라 실패한 젊은이의 독기, 살기, 악기로 똘똘 뭉친 분노까지 쫘악 빼 주는 반전의 해독제다. 어떤 피로회복제나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강력한 해독제인 할아버지의 한 끼 밥상으로 마음의 독기를 씻어낼 수 있어서 우리는 참 행복하다.

- 『2% 다른 길』 중에서
(심명희 지음 / 생활성서사 / 248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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