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제대로 처음 마주친 지상전은 과달카날 전투다. 과달카날은 호주 동북쪽에 위치한 솔로몬 군도의 주섬이다. 섬의 면적은 제주도의 3.5배나 되지만 인구가 극히 적고 섬은 거의 정글로 뒤덮인 오지였다. 1943년 일본군이 이 섬에 상륙하더니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이 섬을 장악하면 호주가 일본군의 공습권에 들어가고, 미국에서 호주로 가는 해상수송로가 봉쇄된다. 호주마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면 미국은 태평양에 발을 붙일 전진기지를 상실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태평양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야 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미군은 반격을 결심하고, 1942년 8월 1만 1,000명의 해병 1사단을 과달카날에 상륙시켰다. 이 작전은 미군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섬에서 싸우려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해야 하지만 그때까지 바다와 하늘의 강자는 일본군이었다. 과달카날에 상륙군을 수송할 때도 미군은 일본군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다. 행여 일본군에게 들키면 사단이 통째로 수장될 판이었다. 다행히 섬에 무사히 도착하기는 했다. 그런데 겁에 질린 미군 함대가 병사만 상륙시키고, 보급품을 절반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내빼버렸다. 졸지에 미 해병대는 섬에 버림받은 꼴이 되었다. 다행히 미군을 먹여 살린 것은 일본군이 축적해둔 쌀이었다. 미군의 반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선발대로 300명 정도의 공병만 파견한 상태에서 나중에 올 본대를 위해 군수품을 미리 쌓아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미군의 보급은 불안했다. 일본군은 미군과의 최초의 지상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었다. 여러 조건이 일본군에게 유리했다. 보급로가 불안한 미군은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었고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미 해병대에 비해 일본 육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정글에 숨어 있던 일본군은 미군 진지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사령부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이 자신감이 전투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미군의 규모에 대해 정확히 파악했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일본군 사령부는 과달카날 탈환부대로 겨우 1개 연대, 3,400명만을 차출했다. 연대의 지휘관인 이치키 기요나오 대령은 중국에서부터 싸워온 역전의 맹장으로 관동군 최고의 대령이라는 칭송을 받는 인물이었다. 병력면에서 열세였지만, 일본군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치키 대령은 본대의 도착조차 기다리지 않고 8월 21일 새벽, 선발대 900명만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철조망과 맹렬한 기관총 세례였다. 미군에게는 이 상황이 마치 움직이는 목표물을 쏘아 맞추는 사격훈련 같았다. 첫 번째 돌격이 실패하자 이치키 대령은 바닷가로 나와 해변 모래사장으로 돌격했다. 미군 입장에서는 지난번보다 더 쉬웠다. 모래톱이 시체로 뒤덮여도 일본군은 후퇴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미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했다. 해변에 일본군 시체가 빽빽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생존자들도 대부분 부상으로 정글에서 죽었다. 이치키 대령은 연대기를 태우고 자결했다. 미군 전사자는 43명이었다.

▲ 계획은 명료하게, 현장에서는 융통성 있게: 한 달 후 약 4,000명으로 증원된 일본군이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은 훨씬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일본군의 공격목표를 정확히 예측했다. 바로 과달카날 전투의 시발점이 된 핸더슨 비행장이었다. ‘피로 물든 언덕’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비행장 앞 작은 고지에 미군은 해병대 중에서도 최정예인 ‘레이더스’를 배치했다. 에드슨 중령이 지휘하는 800명의 레이더스 부대는 그들 최초의 신화를 이 언덕에서 썼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현명한 장교와 고참병들은 일본군의 이상한 특징을 발견했다. 일본군은 준비성이 투철하고 정밀한 집단이다. 그 탓에 부대별 배치와 포진, 작전 명령이 너무 교묘하고 복잡했다. 이렇듯 작전이 복잡하다 보니 현장에서는 늘 뭔가가 어긋나고 부대 간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약점을 상쇄하려는 듯이 무모할 정도로 정면 돌격을 선호했다. ‘준비는 철저하게, 전투는 맹렬하게.’ 옳은 말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계획은 명료하고, 현장에서는 융통성을 최대한 발휘해야 싸움에 이긴다. 하지만 일본군은 언제나 그 반대로 했다.

노련한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돌격이 점점 산만해지고, 돌격은 하는데 그다음에는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침착하게 대응하면 이들은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피로 물든 언덕의 전투는 다시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다. 전사자는 일본군 700명, 미군 59명이었다.

10월 일본군은 드디어 2만 명으로 증원되었고, 야포 같은 중화기까지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직접 야포를 끌고 비가 쏟아지는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야만 했다. 병사들은 완전 군장에 포탄 1발씩을 추가로 짊어졌다. 그리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식량을 반으로 줄였다. 이런 상태로 하루에 10킬로미터씩 5일 동안 정글을 횡단했다. 일본군의 정신력을 보여준 극한의 행군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지칠 대로 지쳤다. 전투가 끝났을 때 언덕 비탈에는 9,000명의 일본 병사들이 누워 있었다.

▲ 정신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은 곧잘 총을 든 미군을 향해 일본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사무라이 정신에 대한 일본군의 집착은 맹신에 가까웠다. 서구 제국에 비해 떨어지는 산업력을 사무라이 투혼으로 극복하고자 시작한 사무라이 숭배는, 과거 억눌렸던 자존심에 대한 반작용까지 더해져서 ‘사무라이 정신은 무적’이라는 공식으로 발전했다. 그러더니 승리한 모든 전투의 원인을 사무라이 정신으로 돌렸다. 이런 태도가 결국 전술의 장점과 승리 원인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포기한 채, 한 번 승리하면 그 전술을 맹목적으로 되풀이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태평양 전체를 사무라이 정신의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엄청난 희생이 있었음에도 민족성을 중시하는 일본의 태도는 현재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중에서
(임용한 지음 / 교보문고 / 288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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