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찌르는 사탄의 속삭임 중에서 가장 교묘하고 충격적인 말은 “너희는 소모품에 불과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화살의 메시지가 들려오는 순간, 그리고 원대한 우주를 무대로 연극을 꾸미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역할이 너무 커서 그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순간, 또 우리가 맡은 역할과 장면이 연극 전체와 갖는 관계를 짐작하기 힘든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연극에서 빠져나와 우리 나름의 작은 단막극을 연출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한다면 우리 마음대로 연극을 꾸려갈 수 있는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작은 이야기에서 구원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의 삶을 철저히 파괴해서 그를 더 큰 걸작품으로 끌어들이려는 하나님의 야성적인 결심을 다루고 있다. 포레스트는 지능이 낮은 데다 소아마비 때문에 사람들의 조롱을 견디며 살아간다. 베트남에 참전하게 된 그는 댄 중위의 휘하에 들어가는데, 댄 중위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영웅들을 배출한 군인 가문 출신으로 전쟁터에서 장엄하게 전사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격렬한 전투가 있던 날, 그는 포레스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지만 두 다리를 무릎 아래로 절단하는 대가를 치른다.

어느 날 밤, 분노를 이기지 못한 댄 중위는 포레스트를 침대에서 끌어내려 목을 조르며 욕설을 퍼붓는다. “나는 전장에서 죽었어야 했어. 댄 중위로 기억돼야 했다고! 지금 내 꼴을 봐. 앉은뱅이가 되어버린 나를!” 그는 자신을 구해낸 것이 그의 삶을 파멸시킨 것이라고 소리치며 울부짖는다. 그러나 포레스트의 대답은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간단하다. “중위님은 여전히 댄 중위님이십니다.” 수치심과 분노, 좌절감에 사로잡힌 그는 뉴욕으로 건너가 연금으로 연명하며 알코올과 마약, 창녀와의 섹스로 시간을 탕진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포레스트가 그를 찾아온다. 댄 중위는 재향군인회 병원에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포레스트에게 묻는다. “검프,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예수님이 천국의 길까지 나를 인도할 거라고?” 댄 중위는 여전히 자신이 잃어버린 삶보다 더 큰 삶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삶을 계속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댄 중위와의 관계를 그렇게 끝내지 않는다. 포레스트는 멕시코만으로 건너가 새우잡이 어선의 선장이 되는데, 빈 배로 돌아온 어느 날 부두에서 ‘아메리카, 내 조국’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휠체어에 앉아 시가를 물고 있는 사내를 발견한다. 포레스트의 동료가 되어 운명을 시험해보려고 달려온 댄 중위였다. 댄 중위는 포레스트에게서 희망의 야릇한 불꽃을 느끼며 자기구원의 확신으로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일어서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좌절을 안겨준다. 댄 중위는 새우가 있는 곳이라며 포레스트에게 자신 있게 방향을 지시하지만 그들이 건져올린 그물에는 낡은 타이어와 쓰레기더미뿐이다. 댄 중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자는 포레스트의 간청에 따라 교회의 집회에 참석한다. 그러나 그는 뒷자석에 앉아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포레스트가 이 비협조적인 수호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길 기다린다.

다음 날도 새우잡이는 역시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한다. 먹구름까지 몰려오자 댄 중위는 좌절감에 분노를 터뜨리며 “검프, 대체 자네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 자네가 믿는 예수님이 내겐 지금 당장 필요하네!”라고 소리친다. 이때 포레스트는 그답지 않게 빈정대듯 관객들에게 “댄 중위가 힘들다고 하나님을 내놓으라고 하다니 별일이네요”라고 중얼거린다. 이때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 배를 파선 직전까지 몰고 간다. 불굴의 사나이 댄 중위는 돛대에 몸을 묶고 그를 괴롭히는 하나님과 마지막 기력이 다할 때까지 담판을 벌인다.

마침내 격노의 폭풍이 가라앉고, 그날 새우잡이에 나선 어선들 중에서 그들의 배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귀환한다.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경쟁자가 없다. 부두에 돌아올 때마다 그들의 배는 엄청난 새우를 쏟아낸다.

영화의 후반부, 포레스트는 어느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자기 옆에 앉은 한 여인에게 그들은 그렇게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댄 중위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냐고 물으며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에서 장면은 새우잡이 뱃전에 걸터앉은 댄 중위의 모습으로 바뀐다. 오랫동안 그의 얼굴에 새겨져 있던 분노와 두려움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혀 예기치 않게 구원받은 사람의 얼굴로 변해있다. 댄 중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니 수줍음을 감춘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포레스트, 내 삶을 구원해준 자네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리고는 다리가 없는 몸뚱이를 배 밖으로 던진다. 포레스트가 깜짝 놀라 뛰어가지만, 댄 중위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편안한 자세로 배영을 즐기고 있다! 저물녘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에서 수영하는 댄 중위에게서 화면이 서서히 멀어지면서 “댄 중위님이 마침내 하나님과 화해한 모양이네요”라고 중얼거리는 포레스트의 말소리가 맴돈다.

- 『거룩한 로맨스』 중에서
(존 엘드리지, 브렌트 커티스 지음 / 포이에마 / 358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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