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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시간의 역습, 권태
한 부부가 허름하고 좁은 거실에서 서로 등을 지고 있다. 영국 후기 인상주의 화가 월터 리처드 시커트가 그린 그림 <권태Ennui>의 한 장면이다. 노인은 눈앞의 한잔 술로 권태를 날려버리려 들고, 부인은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도피와 공상으로 팔을 괸 채, 벽에 걸린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이다. 서로가 서로를 등진 채 자신의 세계 속에서 어떤 교집합도 없이 일상의 한때를 흘려버리고 있다. 둘을 감싸고 있는 ‘적막의 공기’, 그것은 무엇을 해도 서로를 이미 알아버렸다고 믿는 두 사람이 나누는 식어버린 ‘열정의 죽은 거죽’이었다.

한때 사랑했던 여자조차 자갈 속의 모래알처럼 만드는 무시무시한 시간의 역습, 너 권태여. 당신이 마흔이 되면, 상실해가는 젊음에 대한 갈망, 모든 것이 자리 잡힌 무한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덧없음으로 목덜미가 죄어오는 것을 느낀다. 중년의 사내들과 늙어가는 여자들이 비틀거리며,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로맨스는 불륜이 되었다. 인생의 자극이 된다면 무엇이든,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망각을 부르는 감미로운 쾌락의 주사위를 굴린다.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 <권태>는 세드릭 칸의 영화 <권태>보다 상류층 계급인 부르주아의 나른한 권태에 대한 묘사가 정밀하다. 40살의 철학 교수 마르탕은 저명한 저술가이지만 책 한 권 쓸 수 없는 극심한 권태에 빠져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우연히 이웃의 노화가가 그림을 맡기고 죽는다. 그 화가의 모델이자 화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여자, 17세의 세실리아를 만나면서 마르탕은 그녀와 우연히 몸을 섞는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육체적 파트너였던 세실리아와의 관계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비틀려만 간다. 마르탕이 세실리아에게 집착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세실리아에 대한 소유욕으로 병이 날 지경이다.

여기서 세실리아는 모든 것이 무위이자 그냥 그런 대로 흘러가는 어떤 ‘자연’이나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문제는 이 세실리아가 ‘소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오던 세실리아가 오지 않는다. 남자가 생겼다고 한다. 뒤를 밟아 추궁하니 그녀는 태연하게 “당신과 그, 둘 다 좋아졌다”고 고백한다. 마르탕과 달리 세실리아는 관계에 집착하는 법이 없다. 그저 무심하게 만나, 그저 무심하게 옷을 벗고, 그저 섹스를 즐긴다. 세실리아가 이럴수록 마르탕은 세실리아와의 섹스에 더 집착하고 더 뜨겁고 더 감정적으로 변해간다.

이 모호하고 단순한 여자는 돈에도 매수되지 않는다. 이제 마르탕은 지옥에서 살아간다. 갖은 협박과 애원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붙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자 그는 다시 권태로움을 느낀다. 결국 마르탕은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죽음과 절망의 계곡 가까이 가서야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권태는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당신의 결혼 생활은 이제 시간이 지났다. 당신의 일에 대한 전문성도 시간이 지났다. 시간에 지배를 받는 인간인 이상 권태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권태(Boredom)는 시간의 정지란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권태의 정반대 개념인 몰입(Flow) 역시 시간의 정지를 포함하고 있다. 몰입은 흔히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은 몰아(沒我) 개념을 포함한다. 둘 모두 시간의 정지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는 인간은 극단적인 결과를 도출한다. 몰입은 창의와 행복, 왕성한 생산성을 낳지만, 권태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불모의 사막으로 메마르게 해버린다. 시간을 정지시킨 인간의 행동은 그러나 왜 이런 극단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가?

이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 때문이다. 시간을 흘려버릴수록 권태와 같은 과잉의 감정은 다가오고, 시간을 안으로 불러들여 채울수록 그리움과 기다림, 설렘과 같은 결핍의 감정은 늘어난다. 권태와 기다림은 시간을 벼린다는 점에서 동전의 앞뒷면 같지만, 무언가 지독히 몰입하는 대상이 생겨날 때, 권태는 사라진다. 오히려 기다리는 자의 가난함 속에서, 기다리게 만드는 이의 소중함 속에서, 권태를 자각하고 벗어나려는 시도 안에서, 가장 창의적인 변화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을 가득 채우기 위해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주의를 집중하고, 시간을 충전해서 기다림으로 바꿔보자. 역설적으로 우리가 시간이란 괴물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든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이든 일이든 그 의미를 순간순간 ‘재발명’하는 길뿐이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권태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인생사의 한 단면으로, 이제까지의 삶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깊숙한 내면의 신호이다. 그래서 소설가 이상은 그의 수필 <권태>에서 이렇게 말한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忙殺)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 중에서
(심영섭 지음 / 페이퍼스토리 / 312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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