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로메로 주교가 엘살바도르에서 잔인하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때 전세계는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로메로
주교는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는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지배계층 대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았다.

로메로 주교가 살던 엘살바도르라는 나라는 국가 전체의 일 년 수입이 미국 맥도
날드 회사의 한 해 수입보다 작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리고 밤에 행방불명
되는 사람들과 정부가 조직한 암살단에 의해 공공연하게 살해되는 사람들 수가 얼
추잡아 칠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범죄가 만연한 나라였다.

엘살바도르의 쓰레기 하치장은 라틴 아메리카의 시체 처리장이 되어버렸다. 해방
신학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권력층의 횡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빈민
계층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총을 들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 때 로메로 주교는 그들 사이를 오가며 대량학살과 암살에 대항한다는 명분이
살인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며 무기 사용은 옳지 않다고 역설했다. 공포에 대
한 불안이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로메로 주교는 '엘살바도르의 간디' 같은 존
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는 저항의 기치를 높이 든 시민병을 격려하는 한편,
농부들을 위해 계속해서 미사를 드렸다. 그가 지나가는 모습만 보아도 사람들은 희
망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성찬대에 서서 성찬식을 거행하던 중에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이 보는 앞
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그가 암살당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주민들을 하나의 사물
로 전락시키려는 정부의 정책에 협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게 되면,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된
다. 심지어 그렇게 사물화된 사람들에게는 살육장도 예배 드리는 장소 같은 곳으로
화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전제군주들이 꾀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사물 같은 존재가 결코 아
니다. 자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인간 이하의 어떤 것으로 만든 다음, 그에게는 아
무런 인간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구실로 내세워 그를 살해하는 것은 악마적 전
략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을 일단 사물화시키고 나면,
그를 죽이는 것은 작은 벌레 하나 죽이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된다.

그러나 각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고 계셨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지지를 한
몸에 받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인간성을 상실시키는 모든 행동의 배후에는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편견을 분쇄시키기 위한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다.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 17장 16절에 나오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마리아인 문둥
병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갖 경멸과 업신여김을 받고 있던 사마리아
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으셨다(요 4장). 당시에는 그러한 행
동이 1950년대에 미국 남부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이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개혁운동을
펼친 것만큼이나 뜻깊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인간성 박탈로 야기되는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랑이 천국에서 내려오듯, 편견은 지옥에서 올라온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 촌락에는 하늘로 좇아 불을 내리게 하자고 예수님께 권
유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심하게 꾸짖으신 것도 아마 이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의 증오심을 강화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으며, 또한 야고보와 요한의 거룩
하지 않은 소망은 전적으로 마귀적인 것이라고 단호하게 질책하셨다. 야고보와 요한
이 사마리아인을 멸망시켜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들이 사마리아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성령님이 바라시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물화하는 것은 마귀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었다(눅 9:
51-56).


- 캘빈 밀러 저 <생활 속의 영적 싸움에 관한 이야기>(요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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