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생활에서 풀려난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허무주의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받아쳤다. <죄와 벌>은 통상적인 도덕 규범을
초월하여 그저 경험을 쌓기 위해서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 니체(Nietzsche)식 '초인'의
최후를 보여준다. <죄와 벌>은 은혜의 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끔찍한 죄를 저지른
비열한 인간을 그려내고 있지만 회개한 매춘부 소냐라는 인물을 통해 그렇게 망가진 라스
콜리니코프의 삶에 은혜의 치료제가 주입된다. 소냐는 주인공의 시베리아 유형 길을 끝
까지 따라가서 결국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고,
한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한 삶의 무한한 원천이 간직되어 있었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지옥 같은 시베리아 감옥, 그가 가진 기득권을 경멸하고 허약함을 조롱하는 동료 죄수들
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은혜와는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상황
에서 도리어 은혜를 가장 깊이 이해했던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은혜의 개념은 그의
소설 곳곳에 아무 예고없이 조용하게 투입돼서 무신론자들을 잠잠하게 만드는가 하면
견유학파의 논객들을 무장 해제시키기도 한다. 무신론자들이든 견유학파 사람들이든
어느날 갑자기 숨이 멈출 정도로 순수한 은혜와 딱 마주치는 순간, 비로소 삶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가운데 하나인 <카라마
조프 씨네 형제들>은 명석한 불가지론자 이반과 신앙이 돈독한 알료샤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반은 인간의 실패를 분석하고 그런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정치
제도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합당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알료사는 이반이
제기하는 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지만, 인간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사랑'이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알료샤는 이렇게 말한다. "악의 문제라면 해답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알죠." 이반은 욥 이후로 아무도 그려보지 못했을
만큼 논리정연하게 하나님을 분석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동정심에 가득 차서 말없이 일어나
형에게 입맞춤할 뿐이다.

농노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된 아버지의 죽음, 주류 문단에서 쫓겨난 경험, 체포에 이은
모의 처형, 수용소에서 보낸 세월, 불륜, 짝사랑의 아픔, 간질, 폐기종, 각고 끝에 이룬
결혼, 병으로 자식을 잃는 고통, 빚에 몰려 겪은 중압감, 도박 등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살았던 비극적인 삶의 주요 요소들이 모두 담겨 있다. 이 책을
쓰기 전부터 그는 욥기를 공부하고 있었으며 현실적인 고민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소설 탈고 후 두 달 남짓 지나서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실제로
동전 한 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는 순간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릎에는 여러
해 전 시베리아로 유형 길에 받았던 신약 성경이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세상을 떠난 지 102년째 되는 1983년,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템플턴상
수상 연설에서 20세기 러시아의 비극적인 역사를 회고했다. 그는 자신이 물질보다 정신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면서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깨달음은 솔제니친을 회심의 체험으로 이끌었고, 결국 개인적인 인생 행로는 물론
조국 러시아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던 수용소 생활에까지 이르게 했다. 다음은 솔제니친의
템플턴상 수상 연설의 한 대목이다:

"50여 년 전이면 제가 아직 어렸을 때지만, 여러 어른들이 모여서
러시아가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어.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 거야." 그날로부터 오늘까지 근 반세기 동안 혁명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수많은 책을 읽었고, 숱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으며, 격변의 세월이 남긴 파편을 말끔히 쓸어낸다는 마음가짐으로
여덟 권의 책을 써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려 6천만 명이나 되는 인명을
삼켜버렸던 혁명이 오늘날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간 요인을 가능한 정확하게
지적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어.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 거야"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 외에 달리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왜 신앙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앞서 나는 교회를 향해 그렇게 물었었다. 교회는
내가 여러 가지 근원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진원지였다. 기독교의 이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탄복할 만큼 매력적이지만, 그 이상을 실천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믿음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이 난제에 대해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
스키는 각기 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톨스토이는 인간 본성은 완전하다는 믿음을 기초로 자신의 철학 체계를 구축했다. 그는 인간
의 착한 본성이 발현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덮어두고 톨스토이 자신만 보더라도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자기 내부의
모순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10년에 걸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통해서 그런 환상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들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지"라고 말한다. 추구해야 할 이상에 대해서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었지만,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무도 이상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아무도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아무도 그리스도가 정하신 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많이'를 요구하지 않고 '조금'을 찾아내서 높이 평가해주신다. 인간은 스스로
감당하기엔 너무 커다란 목표를 위해 지음 받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미미하나마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려는 노력은 지향점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열망과 좌절,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깨달음만이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 세상
에서 누리는 자신의 삶이 불완전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이상이 더욱 완전하게
구현된 내세의 삶을 소망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내 영혼의 안내자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복음의 높은 이상과 인간의 엄연한 현실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윤리 기준에 비추어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든지 "이만하면
됐어"라는 느낌은 비열한 속임수일 뿐이라는 톨스토이의 깨달음은 아직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주장하는데, 레오 톨스토이는 이 메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서 '절대 이상'과 '절대 은혜'라는 대위법적인 교훈을
얻고 나서 예수님께로 돌아가보니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도 똑같은 메시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 답하거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
하시면서, 또는 이혼과 재물 등 여러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상을 낮은 수준으로 경감해주신 적이 없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톨스토이는 물론,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나 마더 테레사를 비롯해 그 누구도 이러한 계명들을 완전히 따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또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모름지기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인
절대 은혜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됨됨이라든가 지금까지 쌓아온 공로를 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다. 오직 그분의 성품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실 뿐이다. 은혜는
그걸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넘쳐흐른다. 주님은 간음한 여인이라든가,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제자들을 모두 용서하셨다.
은혜는 절대적이며 전방위적이다. 심지어 은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게
까지 미쳤다.

이제는 십대 시절과는 다른 마음으로 신약 성경, 특히 산상수훈 같은 말씀들을 읽는다.
산상수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커다란 격차를 인식하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기준을 어떻게든지 낮춤으로써 그 격차를 줄여보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너나 없이 자포자기 상태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인간에게는
그런 절망적인 상태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상태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처럼 '절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한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발견했던 '절대 은혜'라는 안전한 그물
외에는 그 어디서도 발붙일 곳을 찾을 수 없다.


- <내 영혼의 스승들>(필립 얀시 저, 좋은씨앗)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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