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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한 공부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가 이집트와의 전쟁에 승리 했을 때, 승전국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는 패전국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토스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패전국의 왕을 길거리에 세워두고, 그의 딸이 하녀로 전락해 물동이를 지고 우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했다. 이 광경을 보고 모든 이집트인들이 슬퍼했으나 정작 왕은 땅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곧이어 아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은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포로 행렬 속을 걸어가는 늙고 초라한 한 남자가 자기의 오랜 시종임을 알아본 순간, 왕은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극도의 슬픔을 표현했다.

이것은 그리스 시대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세기에 쓴 『역사』의 3권에 나오는 이야기로, 특별히 발터 벤야민의 글 〈이야기꾼〉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 나는 이 글을 내보이곤 한다. 왕은 왜 그랬을까? 그의 마지막 슬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오래전에 몽테뉴는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왕은 이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조금만 그 양이 늘었어도 댐이 무너질 판이었다.”

딸과 아들까지는 잘 눌러 참았는데 시종을 보자 그 슬픔이 흘러넘쳤다는 것. 벤야민은 이 해석이 만족스럽지가 않았던 모양인지,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놓고 토론을 했다. 벤야민의 친구 프란츠 헤셀의 해석이다.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왕에 속한 가족들의 운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명은 그 자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친구의 말을 풀어 설명해주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가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겠다. 패전국의 왕과 그 자녀들이 고통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 가족은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은 시종은 무슨 죄란 말인가. 비로소 왕은 죄책감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한편 벤야민의 연인 아샤 라치스는 이렇게 해석했다고 한다.

“실제의 삶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으나 무대 위에서는 감동시키는 것들이 많다. 이 시종은 그 왕에게 단지 그러한 배우였을 뿐이다.”

알쏭달쏭하게 들리지만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는 정작 내 가족들의 고통은 무심하게 보아 넘기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때는 뜻밖에 펑펑 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가족에 비해 시종은 확실히 왕에게서 ‘떨어져 있는 존재’다. 그 거리 때문에 왕에게 시종은 일종의 극화된 존재로 다가온 것일 수도 있었겠다.

이제 벤야민 자신의 해석을 들어볼 차례다.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 시종을 본 순간이 바로 그 이완의 순간이었다.”

예컨대 별안간 부모의 초상을 치르게 뒤 사람이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는 현관에 놓인 부모의 낡고 오래된 신발 한쪽을 보고 비로소 주저앉아 통곡하게 되는 상황 같은 것일까. 아마 그런 것이리라. 벤야민은 자신의 해석까지 소개하고 덧붙이기를 헤로도토스가 왕의 심경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으므로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나는 벤야민의 말을 십수 년 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에 어떤 계기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확인해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야기 속 노인은 시종이 아니라 왕의 친구였다. 왕 자신의 해명도 이미 이야기 안에 있었다.

“제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하기에는 너무나 큽니다. 하지만 제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 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벤야민에게 속은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가 소개한 해석들로 우리는 슬픔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이런 것이 슬픔에 대한 공부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428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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