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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장장 577킬로미터를 걷게 된 것은 그놈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제가 상을 받게 된다면, 그 트로피를 들고 국토대장정 길에 오르겠습니다!”

그랬는데……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자 이름이 적힌 카드를 펼쳤을 때 나는 흠칫했다. 거기엔 거짓말처럼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만인이 보는 시상식에서 왜 하필 그런 엉뚱한 말을 해버린 걸까. 그럼에도 나의 농담은 이제 현실이 되어야 했다. 어쨌거나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무대에서 슈트를 입고 멋쩍은 웃음을 짓던 나는 얼마 후 등산화를 꿰어 신고 길을 나섰다. 옛사람은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았다던데 나는 말 한마디에 천릿길을 걷게 된 셈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혼자만 갈 순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왁자지껄 모험하듯 떠나고 싶었다. 공효진을 비롯해 좋아하는 동료배우와 친구들을 모았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내 두 다리로 꼭꼭 밟아 걸어간다면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얼마나 많이 눈에 들어올까? 내 체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 몸 상태와 컨디션이 각기 다른 16명의 친구들이 오직 서로에게 의지하고 기대며 그 머나먼 길을 걷다 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만만치 않은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동이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또 그렇게 도착한 땅끝 마을의 풍경 역시 무척 낭만적이고 아름다우리라 기대했다.

그랬는데…… 수많은 소동과 사건 끝에 국토대장정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날, 이상하게도 나는 그저 무기력하고 허무했다. 그냥 그 여정이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국토대장정을 하는 동안 나는 그저 로봇처럼 걷기만 한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도 촬영했고, 내가 모은 사람들도 챙겨야 했다. 그렇게 매일 난리 법석을 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주도해서 벌인 이 모든 난장과 소동이 그저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엄청나게 걸었는데…… 다큐 촬영도 무사히 마치고 단 한 명의 친구도 낙오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열심히 챙겼는데…… 정작 왜 나는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보람이나 희열 같은 감정이 따라와야 하는 게 아닌가?

‘마침내 우리가 해냈다’는 기쁨과 에너지로 가득한 쫑파티 현장에서 나 혼자만 유령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뒤풀이를 하던 중 나는 점점 의기소침해졌고, 결국 그 자리에서 도망 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 며칠간 꼬박 앓듯이 잤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태아처럼 웅크린 채 계속 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인 듯 생시인 듯 자꾸만 길 위에서 일어난 일들이 눈앞에 보였다. 내가 걸었던 길, 동행한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종일 걸었던 어느 하루, 산뜻한 아침 공기, 내 등을 달궈주던 햇살부터 걸은 뒤 느꼈던 기분과 감정까지 생생히 되살아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들은 희미해지긴커녕 쏟아질 듯이 내게 달려들었다. 길 끝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길 위에서 우리가 쌓은 추억과 순간들은 내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일상까지 따라와 있었다.

그 후 밖에 나갔는데 희한하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더니 말했다. “어? 무슨 좋은 일 있어? 되게 밝아졌다! 더 에너제틱해졌는데?” 너무 많이 들어서 진짜인가 싶어 거울 속의 나를 관찰해보았다. 거기, 전과 비할 바 없이 건강해 보이는 내가 서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길 끝에서 허무함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걷기가 주는 선물은 길 끝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들은 결국 서울에서 해남까지 걸어가는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내 몸의 땀 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여전히 그때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길 위의 순간들에 대한 것이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일 테다.

지금도 나는 길 위의 소소한 재미와 추억들을 모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 『걷는 사람, 하정우』 중에서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96쪽 / 1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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