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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당신이 도시인이라면 이 사물은 거의 늘 당신의 생활 반경 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물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건, 십중팔구 어둠이 찾아온 다음이다. 이 사물은 어둠과 반대 속성인 빛을 품고 있지만, ‘어둠에서만 나타나는 빛’이라는 역설을 동반한다. 바로 ‘가로등’이다.

지금 한번 떠올려보자. 낮에 당신은 익숙한 길거리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가로등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즉시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럼 밤의 길거리를 다시 떠올려보자. 가로등의 존재감은 당신이 움직이는 밤거리 동선 어느 즈음에서 또렷해진다. 그것은 당신이 지나는 어둠 속에서 당신에게 한 줌의 빛이라도 가장 절박한 그 순간, 반드시 필요한 바로 거기에 그렇게 서 있다.

인적이 끊긴 어둠 속에서 섬뜩한 느낌으로 혼자 걷던 골목길, 방향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낯설고 컴컴한 타지를 운전하고 있을 때, 그제야 우리는 이 작은 빛이 소중한 친구이자 보호자로서, 먼 바다를 건너는 항해사의 등대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다시 가로등을 생각해보자.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가로등의 빛이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사방을 덮고 있는 밤의 공간적 넓이와 시간적 깊이, 즉 어둠의 총량에 비한다면 이 한 줌의 빛을 과연 ‘빛’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겨우 빛나는 반딧불처럼, 이 사물의 빛을 다른 무언가를 ‘비추는’ 빛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로등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빛은 실낱같은 희망의 가능성으로 오히려 어둠 속에서 제 존재를 분명히 드러낸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절박하게 어둠 속을 걷거나 음산한 골목길에 있을 때, 멀리 있는 가로등을 보며 안도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사물에서 나오는 빛은 어둠의 전체와 비교할 때 ‘비추는’ 빛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은가.

오히려 그래서 가로등은 우리에게 거꾸로 말한다. 어둠 속에 나타난 빛의 진정한 힘은 어둠을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고. 가로등의 역할은 빛이 사방의 어둠 속에서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예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철학자 플라톤이 쓴 <국가>에는 어둠 속 동굴에 갇힌 죄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사람이 어둠의 공간을 유일한 세계로 알며 살던 중에 단 한 명의 죄수가 천신만고 끝에 밖으로 기어 나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죄수의 호기심과 용기를 자극하는 데는 전면적인 어둠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던 머리칼 같은 빛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빛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의 확인이었다.

어둠 속에서의 빛이라는 문제를 ‘희망’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얘기해보자. 당신은 희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마지막 연을 이렇게 맺는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우에 파란 잔대가 피어나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희망의 이미지는 따져보면 절박한 역사적 현실에 내던져진 사람들의 소망충족심리에 근거한 논리적 비약이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자연적 질서를 인간의 역사에 바로 대입함으로써, 자연의 희망을 삶의 희망으로 바꾸는 마술을 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역사는, 겨울 무덤가에 봄 잔디가 피어나듯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에 관해서라면, 죽은 것이 다시 소생하는 ‘부활’이 문제라면, 차라리 가로등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로등의 힘, 가로등의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 미미한 빛이 어둠 속에서 단지 밝혀져 있다는 사실, 그것뿐일까.

희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의 ‘양’이 아니라, 빛의 ‘방향’이다. 일반적으로 가로등은 가늘고 긴 몸통 위에 빛이 발산되는 머리가 밑으로 구부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즉 빛의 얼굴을 한 어떤 존재가 마치 땅을 굽어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 자리는 희망을 필요로 하는 삶들의 절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가로등의 힘, 가로등의 희망은 그것이 발산하는 빛이 낮은 자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는 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었을까 하는 새삼스러운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발이 신체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둠이 가득한 지상에 신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떤 방식일까. 가로등을 본다. 언뜻 거기에서 신의 실루엣을 본 듯도 하다.

- 『사물의 철학』 중에서
(함돈균 지음 / 세종서적 / 303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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