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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젖으면서 핀다
그녀의 말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의미도 없이 속물성의 잔해처럼 몰려왔다 흩어지는 말들을 노동청 감독원이 기계적으로 잘랐다가 두서너 차례 책상을 친다. 긴박한 상황임에도 알 수 없는 무료함이 밀려든다. 아무리 삶이 연극 같다지만 이건 아니다. 창밖에는 찬연한 4월이 저리도 신명 나게 부풀고 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잔뜩 억울해지는 마음 사이로 헛헛함이 목젖을 타고 올라온다.

6개월 정도 함께 일을 했던 그녀를 해고한 대가는 컸다. 그녀의 귀책사유는 분명했으며 고임금을 지불해야 하는 난점까지 안고 있어 오랜 갈등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새 직장을 구해 보라는 부탁과 함께 한 달간의 말미를 주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폭언을 서슴지 않더니 어처구니없게도 노동청에 고소하여 복직과 부당해고에 관한 임금을 요구해 왔다. 숱한 밤을 잠 못 이루었다. 잡초 같은 그녀의 삶을 가엾게 여겨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내 몸과 영혼만 몰수당한 느낌이었다.

이해하기조차 힘든 그녀의 태도와 문서화하지 않은 해고는 전적으로 노동자 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법 앞에서 진실이 통할 리 없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하루아침에 직원을 거리로 내몬 파렴치한 업주에 지나지 않는다. 초연해지자고, 이성적으로 대처하자고 태연함을 가장해 보지만 몸은 끊임없이 반란 중이다. 아찔한 현기증과 둥둥 울려대는 맥박소리, 게다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 빈속에서는 발작처럼 구토증이 심해진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감독원이 내게 말할 기회를 준다. 가슴이 먹먹하고 머릿속은 하얗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세계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그녀와 필요치 않은 말싸움을 벌여야 하는가? 노동법 앞에서 광기가 들린 듯 당당한 여자, 격류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언어 앞에서 내 말들은 선혈만 토하다 비참하게 나뒹굴어질 게 뻔하다. 그녀의 행동은 생존을 위협당하는 절박한 목마름처럼 보일 것이며, 그에 비해 나의 태도는 범속한 욕망을 채우는 사치스런 취미 정도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블랙커피 같은 나의 진실은 향기를 내지 못하고 하얗게 출혈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흥정하란 말인가?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총을 쏘았다는 『이방인』 뫼르소의 비극이 스쳐 지나간다. 다양한 인간들의 실존방식 앞에서 맛보는 상실감, 공허하고도 허황된 관계 맺음의 끝, 그것이 나를 이토록 절망케 하는 것이다. 뼛속까지 침투하는 듯한 이 고독감, 이 남루한 서글픔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다.

이미 마음의 시력이 사라진 그녀의 눈빛, 무표정하고 포스트 모던한 노동청 건물, 나는 이토록 억울한데 아무 술렁거림조차 없는 세상, 모든 것이 낯설다. 메스껍다. 한 마디도 피력할 수가 없다. 노동자라는 말에서 느껴지던 친숙함과 성실성 그리고 약간의 연민 따위의 감정들은 무엇으로 위안받아야 하는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은 보이지 않는다. 삶은 근원적으로 부조리하다고,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던 철학자들의 말만 질긴 동아줄처럼 나를 받쳐 주고 있다. 산다는 건 참으로 허허롭다.

그녀의 요구대로 부당해고 임금을 산출해 달라는 짧은 말을 던지고 햇살 가득한 안마당으로 나왔다. 눈이 부시다. 수십 그루의 이팝나무들이 투쟁하듯 바글거리며 꽃을 피운다. 한때는 지나치게 고결해서 초췌해 보였던 쌀밥 같던 꽃, 그 이팝나무의 번들거리는 여유가 싫다.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성당을 찾았다. 패배감으로 얼룩진 마음을 딱딱한 나무의자 한쪽 귀퉁이에 내려놓고 기도를 드린다.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다는 기도문이 나의 혈액을 타고 몸과 마음을 적신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내 삶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반짝여야 한다고 치기를 부렸던 적이 있다. 삶의 한쪽 켠에 비켜서 있으면 피안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비껴갈 줄 알았다. 아픔도 없이, 고독을 사랑하지 않고 감히 위대한 무심을 흠모했었다. 만용이었다.

우연 속에서 맺어지는 이 세상 모든 일들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늘 타인 속에서 나를 잃은 뒤에야 나를 찾으며, 삶에 지치고 나서야 시시포스의 후예임을 상기하며 자위한다. 일상이 소통을 피하며 미끄러지고 열정이 배신당할지라도, 단호한 걸음걸이로 운명을 넘어서는 저 시시포스의 영광을 뒤늦게 노래하는 것이다.

기도의 힘일까? 황량한 가슴에 꽃이 피어나듯 마음이 가벼워져 온다. 아주 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불러 본다. 여전히 침묵뿐인, 까마득히 멀기만 한 그 하느님을 속절없이 불러 볼 뿐이다.

- 『그리운 자작나무』 중에서
(조낭희 지음 / 북랜드 / 238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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