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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로를 벗어난 항해
막막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것 같아 좀처럼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외딴 바다에 홀로 버려졌다. 나이 스물아홉, 그리고 백수. 내가 영영 방구석에 처박혀 총각귀신이 되어도 세상은 눈 하나 껌뻑 안 할 것 같았다. 초조했다. 누구는 세상이 아름답다는데,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뭐가 보인다는데,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더 늦으면 이대로 영영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 같았다. 고도의 자본주의 문명사회에서 직업인이 아니고서는 보통의 삶조차 바라기 힘들다. 뉴기니 섬의 다리비족이나 나바호족 원주민으로 태어났더라면 조금 달랐을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뚝 떨어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나는 고단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기자가 되기를 바랐다. 다른 길은 생각도 안 했다. 정해진 것처럼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마침내 기자가 되었다. 오랜 꿈을 이뤘으니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기자의 나날은 뜨거웠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만나 취재하는 게 두려웠다. 꿈은 꿈 그 자체일 뿐 내성적인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내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일인데, 막상 해보니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횟집 수족관에서 뻐끔거리는 물고기처럼 죽음을 향해 하루를 소진했다. 내가 바란 삶은 이게 아니다. 꾸역꾸역 버틸 것인지, 새 길을 찾을 것인지 고민한 끝에 용기 내어 사직했다.

사직은 곧 백수. 나는 일주일 만에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한동안 건설 현장에서 용돈을 벌고 자동차 정비를 배우며 소일했다. 아침이 두려웠다. 무미건조한 일상이 영원히 반복될 것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선원 모집 공고를 보았다. 전 세계를 구경하고 싶다는 꿈에 ‘도전’한 것인지, 막막한 현실에서 ‘도망’한 건지 불확실했다. 그저 그런 보통의 젊음. 그런 젊음에게는 한없이 냉정한 뭍의 법칙. 나는 다리 짧은 뱁새다. 용기 내어 나만의 길로 빠져나가야 했다. 내 보폭에 맞는 샛길 말이다. 도망이자 도전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부산으로 갔다. 해양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내게 길은 캄캄했다. 기댈 언덕도, 피할 그늘도 없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잡상인처럼 여기저기 선박회사 문을 두드린 끝에 자리를 구했다. 막말로 밑바닥, 최하급직 실습생 신분의 1년 무급 승선이었다. 낯선 길은 늘 두렵기 마련. 승선하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배에서 맨손으로 갑판을 청소하고 화물창을 오르내리는 궂은일을 도맡았다. 내 삶이 멀리 차가운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영영 샛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 같은 불안이 덮쳤다.

새옹지마라고 했나. 과연 뜻밖의 세상이 나를 달랬다. 바다는 놀라운 장면으로 넘치고, 항구는 재미난 이야기로 북적인다. 나는 파도를 넘나드는 돌고래의 재롱, 영혼을 울리는 환한 달빛, 보석같이 반짝이는 빙산, 거울처럼 잔잔한 적도 무풍대, 무섭게 쏟아지는 열대 스콜에 탄성을 질렀다.

내가 탄 배는 매번 다른 항구를 찾아가는 부정기화물선이다. 지도에 작은 글씨로도 표시되지 않고 인터넷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오지에 기항한다. 꾸며놓은 관광지가 아니라 개미 같은 현지인들이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삶의 현장이다. 나는 미지의 땅에 상륙해서 항구의 뒷골목을 누볐다. 거지와 창녀, 빼빼 마른 리어커꾼과 대머리 포주를 만났다. 사기꾼에게 속아 길을 잃고 친절한 노파의 도움으로 되돌아왔다. 종종 부패한 관리와 영악한 택시기사에게 당하고 소년의 미소에 감동했다. 번번이 멋모르고 나가서 제법 푸짐한 견문을 안고 돌아왔다. 세어보니 지난 5년간 서른두 나라 마흔여섯 항구에 기항했다. 배를 탄 덕분에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세상을 보고 만지고 맛봤다.

최하급직도 참고 견디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찾아왔다. 단지 항해사가 되어 백수 신세를 탈출했다거나, 월급을 모아 서울 어디에 작은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식으로 이 체제 어디쯤 기어올랐다는 게 아니다. 내가 인생의 항로를 벗어나 얻은 건 다름 아닌 ‘자유’다.

배에는 1등이라는 게 없다. 바다에는 뭍에서처럼 성공과 실패, 합격과 불합격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제 나름의 자유를 만끽한다. 배는 늘 일정하게 나아가고, 선원들은 제자리를 지키면 그만이다. 비교 상대가 없으니 경쟁도 없다. 제 능력 안에서 제 몫의 기쁨에 만족한다. 시간의 자유, 금전의 자유, 여행의 자유, 삶의 자유를 누린다. 나는 선원이 되어 바다와 뭍을, 문명과 야만을, 계절을, 시류를 오갔다.

얼마 전 인천아시안게임을 보며 내가 얻은 자유가 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곧 콜드게임이 선포될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안타를 한번 치려고 이를 악무는 타자, 1승을 거두기 위해 꼴찌 결정전에서 흘리는 땀방울, 다들 금메달에 혈안이 된 경기장에서 저만의 호흡으로 경기하는 선수를 보면서, 자본으로 귀결하는 무한경쟁의 체제에서 빠져나와 나만의 항로를 내 호흡대로 나아가는 나를 발견했다. 늘 빈손으로 돌아오면서도 다시 바다로 나가는 헤밍웨이의 늙은 어부처럼 나는 나만의 자유로운 삶을 얻었다.

- 『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 중에서
(김연식 지음 / 예담 / 296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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