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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도 영원한 어떤 상태
장 그르니에는 그의 글 〈행운의 섬〉에서, 루소가 생 피에르 섬에서 느꼈다고 말했던 ‘지고의 행복’에 대해 인용한다.

“나의 마음속에서 추억을 불러일으켜 세우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시간들이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향락과 비할 데 없이 생생한 쾌락의 시간들이 아니다. 그 짧은 열락과 열정의 순간들은 제아무리 생생히 빛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바로 그 생생함으로 인해서 그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기도 하고, 너무나 재빠르게 지나가므로, 도저히 어떤 하나의 상태를 이룰 수가 없다. 나의 마음이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행복이란 결코 이러한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도 영원한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그 상태의 계속성은 매혹을 낳고 마침내 그것에서 지고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그르니에는 루소가 비엔나의 호숫가에서 찾았다고 믿고 ‘단순하고도 영원한 어떤 상태’라고 묘사했던 그 지고의 행복이란 차라리 ‘어떤 무감각 상태’일 거라고 쓰고 있다.

바쁜 세월에 이런 글을 읽고 이런 글을 써보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려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바쁜 사람도 지루한 사람도 그 영혼의 갈망은 있기 때문에 인생은 어떤 비극성이 들어 있고, 누구나 어떤 순간에는 ‘내가 무얼 위해서 살고 있는 거지?’ 하는 질문과 함께 실존의 슬픔을 진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가 바쁘기만 하다거나 지루하기만 하게 세월을 놓쳐버린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회한과 슬픔은 더욱 클 것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건대, 표면적으로는 지루하고 지리한 세월이기도 했고, 내적으로는 그럴 수 없이 치열한 세월이기도 하고, 어쨌든 고달프고 시달림이 많기도 한 세월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도대체 행복이나 기쁨이 없었던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단 한 순간도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삶을 택하여 일부러 괴로워했겠는가.

아무리 시달림이 많고 괴로웠던 시간들일지라도 나의 그 긴 시간 가운데는 무수히 많은 기쁨과 즐거움과 짜릿함과 행복감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떤 때가 바로 그러한 짜릿한 순간이었는지, 그런 기쁨과 희열의 시간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그 순간이란 너무나 짧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의 저장고에 미처 간직해 두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그것은 유학시절 첫아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의 어느 가을날이었는데,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고 아직 녹음은 푸르렀으나 풀들은 조금씩 노랗게 변색되어 가는 그런 계절의 토요일 오후였다. 그때 나는 아이에게 앙증맞은 점퍼와 바지를 색깔을 맞추어 예쁘게 차려입히고 머리에는 러시아인들이 자주 쓰는 베레모를 씌우고, 웬일인지 아내도 없이 내가 홀로 아이를 데리고 그 햇살이 쏟아지는 아파트를 벗어나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한적한 자작나무 가로수 길을 걸어서 산책을 나갔던 것이다. 아마도 루소가 말한 비엔나의 호숫가에서 찾았다고 했던, ‘단순하고도 영원한 어떤 상태’라고 묘사한 그 지고의 행복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르니에가 표현한 대로 일종의 ‘무감각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지고의 행복으로 느끼지 못한 채, 그러나 실제로는 더없는 자족의 평화로움으로 지워지지 않을 행복의 기억으로 깊이 간직해 두었던 것이 아닐까? 아이는 가끔 재잘거리고,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아이와 손을 맞잡고 가을의 대기와 풍경과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을, 그 순간을 맛보았다.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러웠고, 우리가 잡은 손에서는 기쁨의 샘이 흘러나왔고, 나는 나 자신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상태, 곧 천국의 날과도 같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슬프게도 단말마의 쾌락으로 생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너무나 빨리 너무나 쉽게 너무나 짜릿하게 뭔가를 느껴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그 짧은 쾌락의 순간들을 위해서 현재의 시간들을 허비해 버린다. 이렇게 바쁘고 힘든 세상에 그런 한가한 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한다. 그러나 바쁜 것도 한가한 것도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치열한 것도 지루한 것도 의식의 한 상태임을 깨닫지 못한 채, 세월이 지독하게도 빠르게 흘러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흘러가지도 않고 속도가 더 붙거나 느려지지도 않고 더구나 지독하지도 않은 세월은 없는 것인가? 그런 세월이 있다면 그 세월의 흐름에 기꺼이 나를 맡기고 흘러갈 일이다. 고요하고 평화롭게.

- 『연민이 없다는 것』 중에서
(천정근 지음 / 케포이북스 / 374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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