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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그대
한국전쟁이 나던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졸업한 지 50년이 넘는다. 전쟁 때 행방불명된 친구도 몇 되고, 근년 들어 유명을 달리하는 친구도 하나둘씩 생겨나다 보니 50년 넘게 꾸준히 만나고 서로 경조사를 챙기고 힘들 때 위로하고 기쁨을 나누는 동창은 몇 안 된다.

그중에도 학교 때도 친했을 뿐 아니라 한동네에 살기까지 해서 장장 60년의 우정을 유지해온 친구가 몇 년 전 우리 주위에서 잠적해버렸다. IMF 나던 해에 부부가 같이 하던 작은 사업이 어렵게 돼 친구들로부터 몇백만 원씩 빌려 쓴 걸 약속한 기일 안에 갚지 못하게 된 후였다. 나도 몇백이 걸렸으니 졸지에 빚쟁이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에게 빌려준 돈을 재촉한 적이 없었는데 잠적까지 하다니, 혹시 딴 친구가 심하게 굴었을까 알아봐도 모두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가 동창들로부터 빚진 돈은 다 합쳐 봐도 2천만 원이 채 안 됐다.

그 정도의 빚을 못 견디고 칠십 노부부가 집도 절도 없이 도대체 어디로 유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딱하고 안쓰러웠다. 나보다 마음이 따뜻한 친구가 그 불편한 마음을 견디지 못했는지 오랜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의 거처를 알아냈다. 어느 시골에 방 한 칸을 얻어서 기거하고 있는데 의식주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고 살고 있더라고 했다. 재기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에 어쩌다 그 지경이 됐을까. 우린 아무도 그에게 빚 독촉을 안 했을 뿐 아니라 갚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안 했다.

그러나 기대에 어긋나게도 금년 봄, 4년 만에 우리가 빌려준 돈은 각자의 통장으로 정확하게 돌아왔다. 도대체 그 나이에 뭘 해서 그 돈을 벌었을까. 설사 어디서 눈먼 돈이 굴러왔다고 해도 자기네 거처를 옮기는 게 더 급하다는 건 우리가 심한 빚쟁이라 해도 동의해줄 만큼 그가 사는 환경은 열악했는데 말이다.

며칠 전 그로부터 작은 소포가 택배로 왔다. 얼마나 공들여 포장을 했는지 푸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깻잎 장아찌와 꽃씨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여름 음식이어서 나눠 먹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구나. 최대로 싱겁게 담갔으니 꼭 냉장고에 보관할 것. 날 깻잎은 상할까 봐 씻지 않았다. 무공해니 쌈으로 먹거나 튀겨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집 담 밑에 피어 있는 접시꽃이 축제 분위기같이 화려하고 환희심이 들어 무척 좋아서 여기 씨를 받아 보내니 심고 싶으면 어디 담 구석에 뿌려도 좋을 것 같다.”


돈을 갚고 나서 비로소 그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내가 먼저 말을 걸려 해도 혹시 빚 독촉으로 오해하고 놀랄까 봐 전화 한 통 못 하다 보니 너무 오래 소식을 끊고 살았다. 단돈 천 원도 벌어본 일이 없는 청소년도 몇천만 원씩 카드빚을 질 수 있는 세상에 그까짓 몇백만 원 때문에…….

우리 70대들은 그렇게 변변치 못하고 소심하다.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여전한 몇백, 몇천억 대의 하늘 무서운 부정한 돈 냄새.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권력 주변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들을 볼 때마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안 망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편지를 읽으면서 이러고도 안 망하는 까닭이 우리 70대들 덕이 아닐까 하는 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70대들은 청소년 시절 조국이 해방되고 독립하는 감격을 맛보았고, 한국전쟁을 당해서는 목숨을 걸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고, 전후복구를 위해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자식을 낳았고,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그 자식들을 교육시켜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키웠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식은 정직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키워야 하는 줄 알았고 가난보다는 부정이나 부도덕을 능멸했고, 단돈 몇 푼도 빚지고는 못 살 만큼 남의 돈을 무서워했다. 우리는 이렇게 간이 작다. 그러나 간 큰 이들이 아무리 말아먹어도 이 나라가 아주 망하지 않을 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은 바로 간 작은 이들이 초석이 되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좀 으스대면 안 될까.

- 『호미』 중에서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76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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