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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변주
벌써 밤이 이슥해진 모양이다. 몹시 지친 채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 깨어보니 딸아이가 아직도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다. 내가 잠들기 전부터였으니 그동안도 쉬지 않고 공부 중이었던 모양이다. 어두워져서야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숨도 돌릴 새 없이 피아노 앞에 앉은 터였다. 아이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잠시도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브람스의 . 헨델의 테마에 의한 스물다섯 개의 변주곡이 이 악곡을 이루고 있다. 아이는 이미 악보를 외워두고 벌써 두어 달째 거듭 연습하고 있는 중이어서 내게도 낯설지 않은 곡이다. 열 마디도 채 되지 않는 단순한 선율의 아리아가 테마가 되고 그로부터 차츰 복잡한 리듬과 멜로디를 이루면서 변주된다. 왼손과 오른손의 무척 한가하고 단조롭기까지 한 이 악곡의 주제는 그러나 스물다섯 번의 변주를 거듭하는 동안에 온갖 장식음으로 치장되고, 악보 곳곳에 표시되어 있는 수많은 악상기호를 통해 오묘하게 운영되어 나간다. 여리고 강한 리듬, 소리의 높고 낮은 고비들, 쏜살같이 빠른 진행 그리고 뒤따라 넉넉한 호흡으로 회복되는 구절들이 엇섞이면서 처음에 매우 단조롭던 주제가 가지가지 색채를 띤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흐른다.

아이는 곡 전체를 연습해 나가면서 손가락의 놀림이 매끄럽게 지쳐갈 수 있도록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따로 떼어 반복해서 연습한다. 그래도 다시 짚어나가는 마디마디마다 어느 때는 매우 빠른 부분에서 음이 미끄러져 나가기도 하고, 다음번에는 매우 느리고 아름다운 마디에서 음이 흔들리는가 하면, 어느 때는 아주 복잡하고 섬세한 장식음의 처리가 불완전하다. 아이는 제 마음에 온전해질 때까지 부분 부분에 정성을 쏟는다.

손가락을 매끄럽고 능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연주기교를 완벽히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악곡의 흐름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제 나름대로 곡을 해석하는 일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악곡은 다만 오선 위에 말없는 기호로 주어져 있을 뿐이니 아이가 그 깊은 내면을 소리로 뿜어내고 그 안에 제 스스로의 숨결을 불어넣어 새로운 빛깔을 지닌 소리로 일깨워야 할 터인데… 그만한 테두리를 이루는 일에 어찌 지극한 정성과 인내와 고통이 따르지 않으랴.

앞으로도 아이 앞에는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그 모양도 알 수 없고, 크기를 잴 수도 없으며, 더더욱 그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어려운 삶의 명제들이 숱하게 다가설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당황하고 외롭고 절망하게 되겠지.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그것들을 무단히 뿌리치지 않고 저에게 주어진 마땅한 주제로 받아서 구슬같이 영롱한 장식음으로 처리하고, 곳곳에 알맞은 악상기호를 그려 넣어가며 저렇듯 맑고 아름다운 선율로 변주해 나가야 되겠지.

대체 우리가 삶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것들은 다만, 몇몇 주요한 테마에 불과할 뿐, 삶의 각 악장과 마디마디 악절마다 제 나름의 변주를 더하지 않고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일찍이 어머니로부터 귀한 생명을 나누어 받아서 세상에 올 때 그 첫 울음소리로부터 이미 서로 다른 변주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살아가면서 때때로 남루하고 눅눅한 일상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태어날 때 받은 그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삶의 변주가 필요한 것인가.

브람스의 저 스물다섯 개의 변주곡이 어찌 아름답기만 하던가. 또는 다만 슬프기만 할까. 아름다움과 슬픔과 추하고 악한 것, 노여움과 벅찬 기쁨과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우리들 마지막 이별의 모습까지도… 살아가면서 겪는 수만 가지 풍상들을 어쩌면 모두 지닌 듯이, 때로는 모두 비어 아무것도 없는 듯이 갖가지 은유로 간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천지가 모두 잠든 깊은 밤을 저 홀로 앉아 손가락 끝이 아프도록 짚어보는 브람스의 변주곡을 언젠가 감동적인 선율로 변주해낼 수 있게 되면 그때 비로소, 거기 담긴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변주곡들이 마디마디에 은밀하게 숨겨두고 있는 인간의 온갖 이야기들을 저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밤이 새도록 저 자신을 누누이 질책해 가면서 쉬지 않고 삶을 변주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브람스의 그 속 깊은 뜻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밤이 가면 전에 없이 아름다운 새날, 새 아침이 제 앞에 열리게 되겠지. 창문을 열어젖히고 한 점 티 없이 높고 푸른 하늘을 맘껏 올려다보며 가슴을 활짝 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를 그대로 두고 나는 또 잠에 든다.

- 『지나온 시간은 모두 선하다』 중에서
(최정선 지음 / 수필과비평사 / 296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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