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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 되는 시간
예전처럼 주말마다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아요. 예전처럼 꽃 이파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지도 않아요. 예전처럼 어린 날에 모아둔 앨범들을 쌓아두고 밤새 음악을 주구장창 듣지도 않아요. 예전처럼 밤을 새워 책 읽기에 빠져들지도 않아요. 예전처럼 늦은 밤의 현란한 네온사인을 올려다보며 친구들과 걷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무얼 하고 지내냐고 묻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참 잘 지내고 있어요.

언제부턴가 나는 또 다른 나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니 이상한가요.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나와 대화를 하고 있고, 내 고백을 내가 들어주고 있고, 그리고 나에게 내가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자문자답의 시간을 아침마다 개최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나를 가장 잘 위해줄 내가, 나에게 해주는 말들에 소중하게 귀 기울입니다.

우선, 저만치 밀쳐둔 고백들을 소환해옵니다. 대개의 고백들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실은 이걸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의 의문문을 또 다른 내가 부가의문문으로 바꿉니다. 부가의문문을 듣는 순간들에 나는 내 의문문이 원래의 무게보다 가벼워지는 것을 느껴요. 조금쯤 안심이 된달까요.

그때 나는 내게 부가의문문을 명령문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어떤 명령문에는 거부감이, 어떤 명령문에는 시원함이 느껴지고 그때 나는 고민의 부피가 최소화되는 것을 느낀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청유형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청유형의 말을 내게서 듣는 그 순간이 좋아요. 그때 나는 생각은 멈추고 내가 해야 할 일들만을 남겨놓거든요.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와 나 사이엔 간격이 넓어졌다 다시 좁아지고, 그리고 우리의 가운데에 팝콘처럼 고소하고 뽀얀 언어들이 튀겨져 나오는 걸 보게 됩니다.

이 자문자답의 아침 시간이 좋아요. 억지로 일어나 억지로 졸음을 물리치는 아침이 아니라, 숙면을 취하고 저절로 잠이 깬 푸른 새벽이 우선 내 앞에 있거든요. 푸른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지요. 오른쪽 창문에선 해가 떠오르고, 왼쪽 창문에선 달이 떠 있기 때문에, 나는 해와 달을 보려고 다섯 걸음 정도를 걸어서 방을 횡단합니다. 이 1교시를 나는 ‘해와 달을 보는 데에 다섯 걸음의 시간’이라 부릅니다. 푸른 창문이 하얀 창문으로 바뀔 때까지, 나는 다섯 걸음을 걸어 해를 보러 가고, 또 다섯 걸음을 걸어 달을 보러 갑니다.

하늘가에는 구름이 깔려 있지만, 내 시선은 언제나 구름의 시접을 비집고 나온 빛에 가닿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를 안 보아도, 음악을 안 들어도, 책을 안 읽어도, 진짜 빛을 읽어내는 시간을 누리는 거예요. 그러곤 자전거를 타고 바깥에 나가지요. 입 없는 신체 기관처럼 광장과 길목을 구경해요. 새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떤 나무가 새를 부르고 있는지 두리번거립니다. 간밤에 내린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갓길의 풀들에게 안부 인사도 건네지요. 축축하게 젖은 공원의 흙냄새에게도 안부 인사를 건네요. 세상 모든 사물은 맑게 씻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나는 자전거의 안장의 높이로 거리를 바라보지요. 쌩쌩 달리면서요. 내가 만드는 바람을 나 혼자 느끼면서요. 이 2교시를 나는 ‘바람을 만드는 시간’이라고 불러줍니다. 자전거를 타고 하릴없이 골목을 달리는 속도감 있는 산책길은 한계가 없답니다. 직진으로 달리지 않으니까요. 구불구불 새 골목길을 발견하고 새 골목길에 새로 생긴 가게를 발견하고 골목길이 안내하는 또 다른 골목길을 발견하니까요.

3교시가 시작될 즈음에 나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진열장에 빵을 내놓느라 부산한 빵집에 들러 반갑게 인사하고, 기다리는 동안 빵집 앞 메타세쿼이아 나무의 냄새를 맡습니다. 이 시간, 나무는 관절을 펴고 가장 늠름한 체합니다. 나무 아래 풀도 탱탱하고 돌멩이도 통통합니다. 가게 간판 모서리가 반짝거립니다. 금화를 나누어 갖듯 햇빛을 마음껏 나눠 갖는 이 시간, 모두가 부자가 된 듯 떵떵거리는 모습입니다.

새벽의 박하 냄새가 이 집 저 집에서 아침밥을 하는 냄새로 바뀌는 시간, 나는 집으로 돌아가 3교시를 맞습니다. 자문자답의 조용한 시간을 갖기 위해, 갓 구운 흰 빵과 갓 내린 까만 커피를 경전처럼 앞에 둡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서곡>


- 『시옷의 세계』 중에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64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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