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발렌타인 데이였던 토요일 오후, 꽃다운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가 내겐 별로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난 아무 계획도 없이 집에 혼자 있었다. 우편물 차가 덜거덕거리며 지나
가는 소리가 들릴 때, 나는 내 방을 청소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계단을 한 번에 두 개씩
쿵쾅거리며 달려 내려가, 우체부의 손에서 우편물을 얼른 잡아챘다. 내게 온 카드는 한 장도
없었다. 베트남에서 전투 중인 데이브 오빠가 어머니 앞으로 보낸 편지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2층으로 터벅터벅 올라가서는 닥치는 대로 내 방을 뒤집어 엎어 버렸다. 보통 때
같으면 무엇을 내던질지 몰라 미친듯이 우왕좌왕했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기념품과 선물 받은
물건들, 오래된 노트와 편지들 그리고 상자들. 한때는 몇 시간이고 바닥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죄다 끄집어 내놓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보며 상념에 잠기곤 했었는데,
이제 쓰레기와 함께 몽땅 버려 버린 것이었다! 마치 발렌타인 데이에 관한 감상적인 생각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크리스마스 이브의 스크루지
영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데이브 오빠 생각이 자꾸만 났다. 두 달 전 오빠가 휴가로 집에 왔을 때 우리는
대판 싸웠었다. 나는 큰오빠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오빠는 가끔씩 나를 너무나 화나게 했다.
오빠는 나보다 다섯 살 많았는데, 항상 내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일러주었다. 또
나를 위해 모든 일들을 미리 알아서 해주려고 애를 썼다. 나 역시 성인이 되어 가고, 또 자
랄 만큼 다 자랐다는 걸 오빠는 모르는 걸까? 오빠가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도 우리는 화해하지 않은 상태로 헤어졌다. 난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오빠에게 화해
의 편지를 써서 관계를 회복해야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낡은 가방 하나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으려는데, 가방이 갑자기 확 열렸다. 그 바람에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내 발 앞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1학년 때부터 받은 발렌타인 카드들
이었다. 시간이 참 더디게만 흘러가던 지난 시절이 나도 모르게 생각나서 나는 카드들을 집
어들어 침대 위에 쌓아놓았다. 큐피트, 장식용 종이냅킨, 카우보이가 그려진 카드들. 분홍빛
냅킨에서 흰 가루를 묻힌 하트 모양의 사탕 더미가 굴러 떨어졌다. 어떤 카드에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씌어 있었다. 얼마나 잊지 못할 발렌타인 데이였던가.
예전에 나는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픈 채로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학교에 가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했다. 그 말에 기뻐했어야 정상이었겠지만 그날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 반에서 열리는 파티에 빠지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단호했다. 학교에
절대 못 가게 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잠만 자고 있는데 오빠들 셋이 집에 돌아와 2층으로 뛰어와서는 내 침
대를 빙 둘러쌌다. “이것들 좀 봐, 우리가 받은 것들이야.” 오빠들이 자랑을 했다. “할로
윈 축제보다 더했다니까.” 다들 하나같이 발렌타인 카드에 하트 사탕 그리고 부스러진 설
탕쿠키 등이 가득 든 봉지를 들고 있었다.
“내 것도 가져왔어?” 난 기대에 차서 물었다.
그들은 내 물음에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내가 다시 학교에 가서 네 선물가방이
있는지 보고 올께.” 큰오빠 데이브가 우물우물 말했다. 난 오빠가 학교 갔다 오는 걸 싫어
할지 어떨지, 알 수도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그 쿠키들처럼 뭉개져 버린 기분이
었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거라.” 오빠가 나간 뒤 어머니가 내게 주의를 주었다.
오빠는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오빠는 사탕과 카드가 가득 든 봉지를 내게 건넸다. 수퍼
맨, 카우보이와 카우걸들, 발레리나와 광대, 강아지 등이 그려진 카드들이었다. 그것들은 이
제껏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예뻐 보였다. 나는 하트 사탕들을 색깔대로 줄지어 늘어놓았
다. 잘 읽을 수는 없었지만 딱 하나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말이 있었다. “진정한 사랑!”이
라는 글씨였다. “저게 뭐야?” 나는 오빠에게 물었다.
“그건 엄마랑 아빠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같은 거야. 네가 아무리 멍청하거나 못난이라
도 사랑하시는 것 같은 거지.”
“고마워!” 난 흥하고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후 10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 카드들에 대해
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침대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나는 입에 하트를 물고 있는 강아지
가 그려 있는 카드를 집어들었다. 그 카드엔 “메어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웃기네, 학교
에서는 아무도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생각했다. 우리 식구들만 나를 그
렇게 불렀다. 그러고 보니 모든 인사말이 다 ‘메어에게’로 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
니 다른 이름이 지저분하게 지워져 있고 그 위에 “메어”라고 씌어진 것이 보였다. 지우개
찌꺼기가 고무 부스러기처럼 아직도 카드에 조금 붙어 있었다. 카드 하나를 집어들어 불빛
에 비춰 보니 그게 원래 “데이브”란 글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바꿔 쓴 것
이었다. 사실상 카드들이 다 그렇게 바뀌어져 있었기에 누가 범인인지는 자명했다.
내 십대 시절의, 비꼬는 버릇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
매달렸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 오빠가 내린 정의에는, 여동생이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르는 바
보처럼 행동할지라도 그 애를 위해 멋진 것들을 마련해 주는 큰오빠의 마음까지도 포함되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오래 전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발렌타인 카드들 가운데서, 수퍼
맨 카드를 꺼내 “메어”라는 글자 위에 “데이브”라고 흘려 썼다. 그리고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잘못했어. 나를 용서해 줘. 사랑하는 메어로부터.” 나는 항공 봉투에 ‘데
이비드 리이 드리슬 일등병 앞으로' 라고 주소를 적어서 발렌타인 선물더미 속에 끼워 넣었
다. 멋지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쓴 하트를 덧붙이고는 기도했다. 데이브 오빠가 안전하
게, 빨리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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