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자지껄한 병원 분위기에 오히려 기분이 한결 좋아진 나는 새 환자의 병원 기록부를 들춰
보면서 그녀의 병실로 향했다. 아들 에릭이 집에 가져온 성적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고,
거기다 딸아이 셰넌과는 운전 면허증을 따는 문제로 또 말다툼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여덟 시간 동안은 나보다 훨씬 더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들을 돕는 데 온 힘을 쏟고 싶었다.
이제 겨우 서른 두 살인 레베카는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 화학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했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선 나는 조금 후 깔깔대며 놀고 있는 발랄한 어린 세 소녀 틈에서 레베카를
찾아냈다. 내가 그녀의 담당 간호사라고 말하자 레베카가 남편인 워렌, 여섯 살 된 루디,
네 살 된 한나, 그리고 두 살박이 몰리를 소개해 주었다. 워렌은 아이스크림을 사 주겠다는
말로 세 아이를 달래어 어머니에게서 떼어 냈고, 내일 애들이 또 올 거라면서 아내를 안심
시켰다.

정맥주사를 놓기 위해 알코올로 팔을 문지르자 레베카가 약간 긴장하며 웃었다. "전 주사
맞는 걸 너무 무서워해요." "맞았는지도 모르게 끝날 거예요. 셋을 세어 보세요." 내가 말했
다. 주사 맞는 동안 내내 레베카는 눈을 꼭 감고 중얼중얼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미소지으
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나가시기 전에 책상에 있는 성경책 좀 갖다 주시겠어요?" 나는 그
녀의 낡은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라도 있나요?" 그녀가 물었
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장 35절 말씀이죠." "하필이면 왜 그렇게 슬
픈 구절을 좋아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슬픔을 체험하셨단 걸 알
게 되니까 예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레베카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경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후 몇 달 동안 나는 레베카가 화학 치료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더욱 잦아지자 레베카는 아이들 걱정을 많이 했다. 하긴 나도 내 아이들을
키우는 문제로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은 툭하면 밖으로 나가던가 아니면 제 방
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애들이 레베카의 어린 딸들처럼 내 옆에 꼭 붙어 있던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리웠다. 한동안은 레베카에게 화학 요법이 효과를 발휘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의사들이 또 다른 악성 종양을 발견했다. 두 달 후, 흉부 X선 촬영결과 암이 이미 폐에
까지 퍼졌음이 드러났다. 말기 상태였다. '레베카가 잘 견딜 수 있도록 제가 도울 수 있게
해주소서.' 나는 기도했다.

어느 날은 병실에 들어갔더니 레베카가 녹음기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노란
색 용지철을 집어들어 내게 내밀며 말했다. "딸애들을 위해 녹음을 해 두려고요." 용지철 위
에 적힌 목록을 읽어보았다. 입학, 입교, 16세가 될 때, 첫 데이트, 졸업. 내가 죽음을 맞이할
그녀를 도울 길이 없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는 동안, 레베카는 자녀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있
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아주 이른 아침에 레베카는 녹음 작업을 했다. 가족에 관한 이
야기들과 조언 등을 가득 녹음하던 레베카는 일생 동안의 사랑을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몇
시간 안에 다 채워 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마침내 노트에 적어 둔 항목들을 빠뜨리지
않았나 모두 확인한 후에 레베카는 그 테이프를 남편에게 맡겼다. 가끔씩 나는 만일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무슨 말을 녹음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그 애들에게
어디 있었는지, 누구하고 같이 있었는지를 자꾸 물어 대니까 마치 FBI요원 같다며 농담을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격려와 사랑의 말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오후 3시, 병원으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레베카가 내게 빈 테이프를 하나 갖고
즉시 와 달라고 했다. '무슨 얘기를 빠뜨렸을까?' 나는 궁금했다. 병실에 들어가니 레베카가
상기된 얼굴로 숨을 가쁘게 몰아 쉬고 있었다. 나는 빈 테이프를 녹음기에 넣고 마이크를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루디, 한나, 몰리, 이 테이프가 가장 중요한 거란다." 내 손을
꼭 쥐고 눈을 감고 레베카가 말했다. "언젠가 네 아빠가 새엄마를 모시고 올 거야. 새 엄마
에게 특별히 잘해 드려야 한다. 새엄마에게 너희들을 어떻게 돌보면 되는지 잘 알려 드리렴.
사랑하는 루디야, 화요일마다 네 걸스카웃 단복을 준비할 수 있게 새엄마를 도와 드려라. 한
나야, 너는 스파게티에 미트소스 얹는 걸 싫어한다고 새엄마에게 미리 말씀 드려. 새엄마는
네가 스파게티와 소스를 따로 먹기 좋아한다는 걸 모를 테니까. 몰리야, 사과주스가 없다고
화내면 안 돼. 다른 것도 마셔야 해. 얘들아, 슬퍼해도 괜찮단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으
니까. 그분도 슬픔이라는 걸 알고 계시니까 너희들이 다시 행복해지도록 도와 주실거야. 꼭
기억하렴, 엄마가 너희들을 언제나 사랑한다는 걸 말이야." 녹음기를 끄자 레베카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고마워요, 낸."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레베카가 간신히 말했다. "이 테이프를
우리 애들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입안에서 웅얼거리듯 이 말을 하고 레베카는 곧 잠이 들
었다. 언젠가 레베카의 아이들을 위해 이 테이프를 틀 날이 오리라....

레베카의 담요를 잘 매만져 준 후에 나는 차를 몰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문득 내 딸 셰
넌도 소스를 따로 먹기 좋아한다는 게 생각났다. 성가시기만 했던 딸애의 그 괴상한 버릇이
오히려 이젠 그 애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가 된 듯했다. 그날 밤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스파게티 소스가 접시 바닥에 말라붙을 때까지 한참 동안 나와 함
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꼬치꼬치 따져 묻는 것도 없이, 불평하는 말도 없이 밤늦게
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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