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정초였지만 날씨가 좀 누그러져 있던 어느날 오후, 수원 장을 보러 나갔었다.
장보기를 끝내고 돌아 나오는 길에 골목 좌판 가운데 어울려 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가 눈에 띄어 발길을 멈추었다. 무말랭이, 취나물, 고사리, 시래기를 그릇에
담아 놓고 계신 할머니는 퍽 연만해 보였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것을 팔아드리기 위해 무말랭이를 사며 여쭈었다.

"할머니, 금년에 몇이신데 이렇게 장사를 나오셨어요?"

"갓 여든이우."

"세상에... 그런데 이렇게 기운찬 모습으로 일을 하시는군요."

내가 놀라워서 입을 딱 벌리자 할머니는 걸걸한 목소리로 대꾸를 하셨다.

"아이구 날 보구 놀라시우? 요오 윗골목에 가면 여든다섯 살짜리가 앉아있을 걸?"

나는 그 말씀에 떠밀리듯 일삼아서 골목으로 찾아들었다. 개인집 블럭 담그늘이어서
춥고 좁은 골목이었는데, 그곳 역시 장이 서 있었다. 거기 담그늘에 머리가 하아얀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그런데 그 깨끗하고 정정하고 어여쁘신 모습에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잃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그러진 날씨라고는 했지만 담그늘은 음산하기
짝이 없어 보였는데 거기 앉아 계신 할머니의 모습은 목화송이처럼 밝고 따스해 보였다.
할머니의 두 볼은 복숭아 꽃빛이었다.

"아니 세상에,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고우셔요, 그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서 그냥 그 자리에 까치다리로 쭈그리고 앉았더니 할머니는 수줍어
하시면서 손을 내어저으셨다.

"아이구 곱기는... 아이들이 바나나 타령을 하길래 이것 팔아서 바나나를 사다 주려구
이렇게 앉아 있어요."

두어겹 신문지 위에 낡은 방석 하나를 깔고 앉아 계신 할머니 앞에는 콩 두어 되, 팥
서너 되 그리고 무말랭이와 도토리가루 등 지난 한 해 동안 쉬지 않고 거두셨을 할머니
의 농사가 알뜰하게 담겨 있었다. 그 한 가지 한 가지는 예사로운 콩이나 팥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이요 정성이요 땀이요 사랑이었다. 그러나 할머니 그 자신이나 그 앞의 소산
물은 이것이 사랑이요 하고 버젓해 하지 않고 오히려 숨죽여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나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무말랭이를 또 샀고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더 들으려고
얘기를 끊지 않았다. 신기해 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건너편을 가리키며 웃으셨다.

"이 골목엔 노인이 많아요. 저 건너편 저이도 팔십이 넘었는 걸?"

건너편 할머니는 약간 얽은 얼굴에 억세 보이는 모습이었고 좌판삼아 펼쳐 놓은 물건도
훨씬 실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이렇게 버르적거리지 않으면 우리집 살기는 좀 힘들거든."

여든두 살의 할머니는 걸걸하게 웃어제꼈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 시장 골목 안의 할머니들은 누구인가를
사랑하며 일년 농사를 짓고 음습한 겨울 골목에서 뼈가 시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지만
당신들이 누구를 사랑하느라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분들은 사랑을 숨쉬고 살고 있었지만 사랑을 내세워 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년내내
땀흘려 거둔 곡식을 바나나 몇 개와 바꾼다 하여도 그것을 좋아라고 먹어댈 손주 아니면
증손주의 기쁜 얼굴을 바라보는 그 몇 분 간의 기쁨에 그 모든 것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내어주는 것이다. 그 할머니의 정정함, 어여쁨, 그 향기롭고 청청한 생명이 뿌리박고 있는
사랑의 터를 잊을 수가 없다. 사랑만이 완전한 생명이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내세우지 않고 사랑 속에서 묵묵하게 살고 계신 노인들은 대개가 정결
하고 깨끗한 노후를 지내고 계시다. 늙는 일까지 하나의 덕목으로 말없는 가르침을 사랑으
로 전하면서.


나는 그날 이후, 나의 생명은 어디에 뿌리를 박고 있는가 이따금 돌이켜 보고 있다. 나의
노년에 나의 나이에서 향기가 날 것인가, 악취가 풍길 것인가에 대해서도.


- 소설가 정연희
<주부편지>(홍성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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