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의 말로 한 사람의 마음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다. -에머슨-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또 다른 소설인 '양치는 언덕'에 인간의 몸 중 가장 죄가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대답은 눈이었다. 눈, 그럼직하다. 인류 최초의
범죄도 선악과가 하와의 눈에 보암직하여 안목(眼目)의 욕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나는 그 대답이 혀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 때의 일이다. 겨울 방학중에 고향에 내려갔는데 친구로부터 시내 중심가의 다방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러 나갔는데 시내 중심가라고 해도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고, 공기 또한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그 분위기는 다방 안까지 이어져 클래식 음악 다방인 그 곳은 사람이 없이 조용한
가운데 깊은 원두 커피 향기만 무거운 음악에 실려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곡명도 모르고 썩 마음이 끌리는 음악도 아니었으나, 격조에 신경을
쓴 듯한 장중한 분위기의 원목 가구들, 여기저기 놓여 있는 꽃꽂이와 장식들이 마음에 드는,
넓으면서도 아늑한 공간과 보고 싶던 친구와의 만남이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서로의 안부
를 묻고 중요 관심사들을 대강 나눈 후 우리의, 아니 나의 화제는 못나게도 우리가 둘 다
아는 남학생에 대한 비방이었다. 친구는 가볍지 않은 성품이라 불필요한 말은 안 하는 편이
었는데, 그러면서도 풍성한 대화를 누렸다는 기쁨을 줄 뿐 아니라 진실하고 총명하며 유머
감각이 있는 괜찮은 애였다. 평소 아무 데나 끼어든다고 여겨지던 남학생을 심각하게 미워
해서가 아니라, 심심풀이 팝콘 삼아 죄없는(?) 도마질을 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시리도록 깨끗한 겨울 아침 공기가 인상적
이었던 만큼, 하루의 전반부터 남을 비방이나 한 나의 마음밭, 입술이 나도 싫었던 모양이
다. 옷을 갈아입고는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성경을 집어 무작정 펼쳤다. 성경을 읽으면 그
우중충한 기분이 좀 씻겨질까 하는 무의식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교회를 다닌 지 두어 달도 안 되었고 성경을 처음 읽기 시작하던 터라 누가복음
서를 한 번 읽은 후엔 체계 없이 아무 데나 펼쳐지면 몇 구절 읽는 이상한 독서를 하고 있
었다. 성경책을 반으로 가르며 펼치는 순간 마치 영화 간판의 입체 글자처럼 툭 튀어 나와
눈에 쑥 들어오는 글자가 있었다. "너는 혀로 범죄하지 말라."

또 있다. 역시 그 때쯤의 일로 말을 좀 세게 하는 과(科) 동기와 만나기만 하면 기발하면서
도 재치 있는 말, 문학작품에 나오는 유명한 말들을 아는 대로 총동원해서 밉지 않을 정도
의 애교를 담아 상대는 깎아 내리고 자신은 올리는 언어 유희를 즐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
터인가 둘 사이가 조금씩 서먹해지는 것 같더니 나중엔 뭔가 심각한 상태란 느낌이 드는 단
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어느 날 조용히 생각하며 그 원인을 점검해 본 결과, 두 사람은 서로가 나눈 말장난
으로 인해 더 친밀해지긴 커녕 오히려 피차 알게 모르게 입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끙끙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깎인 위상을 회복하고 상대의 우위에 서기 위해 말 펀치의 강도
도 교묘하게 더 높이고, 또 그만큼 강한 반격에 상처를 받아가면서... 상처에서 흐른 피가
가슴에 고이고 있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중에 '사람을 해치는 것이 도끼나 칼이 아니요, 혀'라는 것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
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성경 야고보서에서 읽게 되자 절실하게 공감이 되었다. 그후, 나는
다윗의 싯귀에서 본받아, 사람들과 대화하기 앞서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재갈을 물려주
소서'라는 기도를 자주 하게 되었다.

모름지기 나의 혀가 가끔씩, 이롭게만 사용되기를...

시인 김하원

- 국제신문 '뜨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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