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하나님의 은혜>(필립 얀시, IVP)를 읽고

스테디셀러인 이 책은 심리학자인 래리 크랩이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쓰고 있다"고 평할 정도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시종일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게 하는 귀한 책이다. 복음의 핵심이기도 한 '은혜'는 종종
세상의 법칙인 비은혜에 가려 망각되곤 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통해 새삼 은혜의 메시지를
접할 기회를 갖게 됨은, 그 또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한다.

'복음주의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를 듣는 필립 얀시(Philip Yancey)가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요단) 이후 또 하나의 역작으로 내놓아 스테디셀러가 된 이 책은 풍부한 예화를
사용한 섬세한 터치와 영적 통찰력으로 이 글을 대하는 독자들마다 단비처럼 은혜에 흠씬
취하게 한다. 또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글솜씨는 거의 압권이다.
번역 역시 윤종석 씨의 명성에 알맞게 예리한 필치로 이 책의 맛을 한층 더해준다.

"'은혜'란 분명 놀라운 말이다. 과연 우리 시대의 '마지막 최고의 단어'다.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세상이 믿음의 닻을 내리기에 은혜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필립 얀시는 자신을
방황과 배회와 절망으로 얼룩진 신앙 여정을 거치면서 은혜를 갈망했던 한 순례자라고
밝히면서, 그래서 이 책도 은혜에 대한 논리나 설명보다는 실제적인 은혜를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서 썼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개념은 인간의 모든 본성과는
상반되는 것 같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 -
모두가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뿐이다. 예수님께서도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본능적
저항을 잘 아셨기에 은혜 이야기를 더 자주 하셨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고루 비취는
햇빛,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거저 먹고 사는 새, 가꾸는 이 없어도 험한 산자락에 절로
피는 들꽃 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세상을 보여 주셨으며, 한 마리 잃은 양,
잃어버린 동전,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은혜란 믿어
지지 않을 만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인 것임을 강조하신다."

얀시는 도입부에서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 아이작 디네센(필명)이 쓰고 그후
영화화되었던 컬트의 고전 <바베트의 만찬>의 줄거리를 인용하면서 "은혜란 베푸는 자의
부담으로 값도 내지 않은 자들에게 베풀어진,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진수성찬처럼
거저 받는 선물이기에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믿음으로 기다리다 감사로 인정하면
그뿐"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철저히 비은혜로 움직인다. 모든 것이 나 하기에 달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우리를 다른 길로 부른다. 은혜의 색다른 계산법으로.

"은혜는 불공평하다. 이는 은혜의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다. 아버지한테 끔찍한 일을
당한 딸이 몇 년 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에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춘기 아들이 저지른 숱한 비행을 어머니가 그냥 묵과해야 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그러나 은혜는 공평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은
종족, 인종, 국가에도 그대로 일어날 수 있다. 부자간, 형제간, 학자간, 국가간, 인종간에
틈을 벌려 놓고 그냥 두면 그 틈이 점점 넓어지는 비은혜의 간극에 대한 처방은 오직 하나,
용서라는 가느다란 밧줄뿐이다."

"용서에도 은혜처럼 무자격, 과분함, 불공평이라는 묘한 특성이 있다. 그렇기에 은혜의
복음은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끝난다. 하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사 우리로부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대우를 당하신 뒤 그 잔혹 행위를 오히려 인간을 위한 구원의 길로
삼으심으로써 죄와 보복의 냉혹한 율법을 파하셨다. 정의와 용서에 끼인 진퇴양난을
갈보리가 해결한 것이다. 예수님은 정의의 모든 혹독한 요구를 친히 그 무죄한 몸에 지사
비은혜의 사슬을 영원히 끊으셨다. 이처럼 세대를 타고 흐르는 구속(拘束)의 사슬을 끊을
강력한 힘은 온 세상에 오직 은혜밖에 없다. 은혜만이 비은혜를 녹인다. 우리도 이 은혜의
물줄기 안에 살 때 비로소 남들을 은혜로 대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은혜는 사람을 변화
시키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용서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꾸준한 기술 연마가 필요하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말했다. "용서란 간헐적 행위가 아니라 영구적 태도다." 용서는 단지 종교적인
감상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인간 영혼에 근본적인 법칙이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면 무릎이 깨지는 것처럼 용서의 법칙을 어기면 영혼에 치명상을 입고 다시 한 번
인과의 사슬에 묶인 죄수가 된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줄 선물로 은혜와 용서의
문화를 가꾸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을까?

헬무트 틸리케의 말대로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 하나님이 빚으신 원래의 모습으로
보셨다. 먼지와 때의 껍질을 뚫고 이면의 본모습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과 죄를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죄 속에서 본래 그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던 이질적인 것,
그를 사슬로 묶어 죄의 종노릇하게 한 것, 그분이 다시 자유케 하사 참 자아로 돌아오게
해주셔야 할 것을 보셨다. 그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모본
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도 '은혜로 치유된 눈'이 필요하다. 내 자신에게 그토록 풍성히
부어 주신 은혜가 다른 이들에게도 얼마든지 임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남조 시인이 오래 전에 쓴 '설일(雪日)'이란 시의 구절이 떠오른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그렇다. 당신도 나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은총의 돌층계 어디쯤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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