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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 소설가 김연수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초등학교 시절의 장래 희망이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가격 등도 필요 없다. 출생증명서에 생물학적 사실 관계를 밝히는 숫자만이 기재돼 있는 것처럼. 여권에도 오직 생물학적인 ‘나’에 대해서만 적혀 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그 이상의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는 등 뒤에서 닫히는 출국장의 문 그 너머에 남겨져 있다.

출국장으로 들어설 때, 한 번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여행자는 없을 것이다. 언제나 거기에는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인사를 하는 환송객이 서 있다. 환송객들은 인드라의 그물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거기가 바로 내가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여권을 들고 출국심사대 앞으로 나아가는 나는 그 그물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돌아와 입국장을 걸어 나갈 때까지 이제 더 이상 내 주변에서 그물이 출렁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 불과할 것이다. 여권을 손에 든 내가 어쩔 수 없이 고독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처음 가 본 공항은 김포공항이었다. 독일로 떠나는 여자친구를 환송하러 간 자리였다. 그녀가 떠나고 난 뒤, 나는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각형들이 있었다. 나는 그 천장의 사각형을 올려다보며 ‘cell’이라는 영어 단어를 떠올렸다. 그 단어를 처음 떠올린 것은 서울구치소에 갔을 때였다. 면회신청을 하는 곳은 공항 대합실과 대단히 흡사했다. 거기 천장에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각형들이 있었다. 그 사각형들을 보면서 나는 ‘cell’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때의 ‘cell ’은 물론 ‘독방’의 의미였다.

두 곳의 천장에 시멘트로 만든 돌출 격자무늬가 있었던 것은 우연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항 대합실과 구치소 면회신청실의 천장에 수많은 사각형을 배치해놓는 게 꽤 설득력 있는 은유라고 생각했다. 공항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사람이나 미결수가 되어 구치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은 공히 몇 개의 숫자만으로 이뤄진,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는 것일 테니까.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든, 독방에 앉아 있든 그들은 이제 사회적인 그물망을 벗어난 단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그건 지독한 역설이다. 공항을 찾아가는 까닭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공항 대합실에 서서 출발하는 항공편들의 목적지를 볼 때마다 그토록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망각, 망실, 혹은 망명을 향한 무의식적인 매혹. 하지만 그런 매혹에 사로잡힌 인간이 가장 먼저 지녀야만 하는 것이 바로 여권이라니. 그런 증명서란 구치소, 신병 훈련소에나 어울리는 것이지, 머나먼 익명의 공간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어색한 문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 공항의 우화는 이렇게 완성된다.

공항에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나 자신 사이의 어떤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 둘은 같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다. 내가 망명에 성공한다면, 내게 남는 것은 여권에 나와 있는 그 생물학적인 존재, 단독자적인 존재가 되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게 바로 내가 꿈꾸는 다른 존재다. 출국심사대를 빠져나갈 때마다 나는 거의 다른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은 너무나 감미롭다. 그런 점에서 공항은 환각의 극장이며 착각의 궁전이다. 그리하여 공항은 마침내 삶에 대한 절절한 역설이 되는 셈이다. 덧없이 반복적으로 스쳐가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은 영원하다. 다만 우리만 스쳐갈 뿐이다. 출국심사대에서 이제 드디어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그리하여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오면서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 혹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였던 나는 곧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 어떤 것은 공항을 빠져나가 바로 집으로 돌아간다. 늘 먹던 반찬으로 밥을 먹고 나면 거기가 집임을 실감할 것이다. 그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공항은 마치 생을 바꾸는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며칠, 혹은 몇 달이 지난 뒤에 우연히 여권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권에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물론 타지를 떠돌 때였다.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공항에서 우화는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무례한 타지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덧없이 반복되는 존재일 뿐이다. 공항의 우화에 주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 『나만의 공간』 중에서
(황인숙 외 지음 / 개마고원 / 233쪽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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