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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바늘 - 소설가 공애린
나는 ‘벼락치기’의 명수다. 여고 때 화제에 올랐던 반성문 사건이 있다. 아침마다 늑장을 부려 지각을 밥 먹듯 했던 나는 앞으로의 올바른 생활 태도를 다짐하며 각서 겸 반성문을 써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마저 미루기 십상이어서 등교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벼락치기로 노트를 메우곤 했다. 지각생의 멍에는 좀처럼 벗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다 아무리 다짐해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는 교문을 들어서는 내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지만, 그나마 반성문을 썼다는 충만감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영문인지 교단 위로 올라선 담임이 아주 우렁찬 목소리로 내 반성문을 낭독하셨다. 나는 처음 얼마간 내 귀를 의심했지만 이내 아연실색하여 책상에다 고개를 파묻었다. 그 길지 않은 시간이 내겐 영겁의 시간 같았다. 게다가 낭독을 마친 선생님은 내게 “반성문은 이토록 구구절절이 가슴을 울리도록 쓰면서 시간은 왜 못 지키냐?”라는 따끔한 질책까지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쥐구멍을 찾아 꼭꼭 숨고 싶었다.

제2의 천성이라고 불리는 습관은 타고난 성격이나 성품 못지않게 삶을 지배하는 법이다. 이후로도 나는 넌더리가 나는 벼락치기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은 거머리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 어느덧 내 삶의 주인인 듯 호령을 해댔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내가 지은 소설의 집도 벼락치기의 산물이었다. 첫 데뷔작부터가 그랬다. 뒤늦게 신문에 난 공모 기사를 읽고 보름 만에 중편소설을 썼으니 만용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탓으로 덤벼든 무지의 소산이랄까. 그런데 졸속에 분량조차 채우지 못했던 그 소설이 덜컥 당선되고 말았다. 이변이 일어난 터였다. 그래서일까. 운 좋게 당선이 된 이후로도 나는 벼락치기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마감시간에 쫓기며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모는, 다분히 마조히즘적인 쾌감에 중독되어갔다. 굶주린 사자의 발톱에 찍혀 비명을 내지르는 습관의 노예답게.

뮤즈의 탈을 쓴 악령은 그런 자리를 파고들기 마련이다. 그들은 달콤한 사탕발림 같은 유혹의 손길로 검은 안대를 눈에다 덮어씌우곤 괜찮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다. 진정한 뮤즈는 결코 쉽게 찾아오거나 말하는 법이 없으니까. 이유야 어쨌든 나는 졸속으로 쓴 작품을 책으로 발간해내는 일을 서슴없이 해댔고, 그러다 보니 한 해에 무려 세 권의 소설책을 출간한 적도 있었다. 마치 책임감 없는 산모가 반짝 풋사랑의 후유증인 미숙아를 아무렇게나 거듭 출산하는 것처럼.

바늘로 우물 파기! 어느 날 불현듯 내 귀를 두드린 말. 오르한 파묵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터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말을 굳이 인용했다.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온 고통의 비수를 꺼내 보이듯 조심스러우면서도 비장하게. 특별히 그는 이 말을 작가들을 염두에 둔 멋진 표현이라고 피력했는데, 작가라는 직업의 비밀을 영감이 아닌 끈기와 인내에서 찾은 그에겐 참으로 합당하지 않을까. 그런 그가 이슬람 문학의 걸작 ‘페르하트와 쉬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사랑하는 여인 쉬린에게 도달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산을 뚫어 길을 만든 페르하트, 그야말로 바늘로 우물을 판 끈기와 집념의 승리자이니까.

터키 사람들에게만 ‘바늘로 우물 파기’가 있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그것에 견줄 만한 ‘낙숫물로 바위 뚫기’가 있다. 둘 다 공들여야 할 시간과 엄청난 끈기, 인내를 말해주고 있지만, 애당초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바리케이드도 품고 있다. 헛된 망상과 우매함을 빗대는 냉소와도 같은. 그러므로 보통 사람이 그 일에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숱한 인내와 노동력을 감당할 용기와 자신감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손에 쥔 바늘의 기능과 우물의 존재 여부를 의심부터 할 것이기에.

진정한 문학의 출발을 책들로 둘러싸인 방에 자신을 감금하는 일이라고 말한 오르한 파묵. 그는 바늘로 우물을 파는 일을 묵묵히 실천했고, 결과적으로 달콤한 물을 마셨다. 물론 혼자서만 마신 건 아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목마른 입을 축이게 했다. 한데, 바늘로 우물을 파는 그의 소설 작업에 벼락치기가 통했을까?

언제부턴가 내 몸속에는 바늘 하나가 떠돌고 있다. 때론 심한 통증을 안겨다주기도 하는, 내 삶의 불침번처럼 혹은 멘토처럼 존재하는 ‘오르한 파묵의 바늘’. 어둡고 깊은 땅속 우물을 찾아 오랜 세월 동안 끈기와 인내로 버텼을 더듬이 같은 그 바늘. 어느 날 문득 내 머릿속 깊이 이식된, 아니면 혈관을 뚫고 들어왔을지도 모를 그 예리한 바늘이 수시로 고문을 해댈 때마다 나는 조용히 뇌까린다. 어쩌면 회개한 중독자가 겪는 금단현상일 거라고, 침체된 습관의 쇠사슬을 벗어나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 『반성』 중에서
(김용택 외 지음 / 더숲 / 2010년 12월 / 256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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