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조기가 걸렸다. 맑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나풀거리고 있는 조기의 모습이 왜 그리 우울해보였던 것일까.

TV에서 본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붕괴 장면이 무고하게 죽어갔던 한 팔레스타인 소년과 그 아버지의 피끓는 절규소리와 함께 조기 속에 겹쳐지면서, 실존에 대한 새삼스런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불안감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 삶은 언제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니, 삶은 역설이며, 모순이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순리가 된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자신의 삶을 마감한 한 여인의 죽음맞이는 미국의 무소불위의 패권주의와 일부 이슬람 급진 근본주의자들의 극단적 테러리즘 사이에서 내가 찾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자욱한 연기 속,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남편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일이었다. 그녀가 죽음의 순간에 말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단어는 바로 '사랑', '사랑'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라고 매일매일 되뇌이는 삶이 아닐까. 그리고 타인 또한 그러한 사랑으로 죽음을 맞이하도록 자신의 사랑을 쉼없이 드러내는 그런 삶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맞이는 바로 그러한 사랑의 결정체가 아닌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미국의 보복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탈레반 정권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 속에 사랑은 없으니 예수도 없다.

"사랑한다"라고 고백한 그 여인의 고백이 사랑을 낳기보다는 더 큰 증오를 낳고 있는 이 역설적인 현실 앞에서 누가 "사랑하라" 말할 수 있을까.

아들과 딸,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랑하라" 말하는 이들은 미치광이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고한 복수는 또 다른 아들, 또 다른 딸, 또 다른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낳게 되고, 그것은 끝도 없는 복수와 복수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사랑은 간 데 없고, 증오와 복수만이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채울 것이다.

내 눈 앞에서 펄럭이는 조기 속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 어른거린다.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아야 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까.

뜬금없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의아스러워 하는 아내. 비단 가족뿐이랴.

삶의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라도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한도 끝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의 삶 속에서 만 분의 일만큼이라도 전달한 후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다. 매일매일 죽는 연습을 좀 더 해야 할 모양이다.

- L. A 사랑의 교회 게시판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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