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기막힌 것을 선보이려는 작위 없이, 힘을 빼고 아주 단순하게 하양과 파랑 두 색만으로 이뤄진 산토리니 섬에선 현란한 온갖 색깔이 탈색된다.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하게.



화이트와 블루의 세상, 산토리니
그리스의 수많은 섬 중 하나, 산토리니. 그 섬 안의 작은 마을 이아로 가는 택시는 말 잔등 위를 달리는 것 같다. 도로 위에 공을 두면 구르고 굴러 바다에 풍덩 빠질 것만 같은 경사다. 비스듬한 경사 아래로 넓게 들판이 펼쳐져 있다. 30분 만에 이아에 도착하니 산토리니의 상징인 돔형 푸른 지붕의 정교회 건물들이 등대처럼 눈에 띈다. 돔은 블루, 건물은 화이트다. 교회 건물만이 아니다. 산토리니는 온통 화이트와 블루, 두 가지 색깔로만 이뤄져 있다.

지금 서울에선 찾아보기 쉽지 않은 달동네처럼 좁고 경사진 계단과 골목이 이어진다. 미로를 헤치고 20여 분 지나니 절벽 너머로 푸른 바다가 반긴다. 바다의 절벽 위에 위태롭게 장난감처럼 서 있는 흰 집들은 동화 속 ‘하얀 나라’ 공주나 난쟁이들의 집인 듯 앙증맞다. 절벽 아래 쪽빛 먹물은 검게 그을려버린 삶의 어둠을 송두리째 잠재우는 순수의 자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포도주를 한잔하지 않을 수 없다. 절벽 위 하얀 집에서 해물과 포도주를 주문한다. 메데이아가 청동 거인 탈로스를 유혹한 ‘젊음의 묘약’ 이코르가 바로 이 포도주임에 틀림없다.

블랙비치, 레드비치를 걷는 자유
다음 날, 모래가 검어서 ‘블랙비치’로 불리는 해변으로 향했다. 발바닥을 태울 듯이 뜨겁지만 그래도 싫지 않다. 자유는 시련조차 즐겁게 감당케 해주니까. 모래 색이 붉어 ‘레드비치’로 불리는 해변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한가해서 마치 무인도를 걷는 것 같다. 길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해안가를 따라 걷는데, 한 청년이 중년의 두 여인과 함께 다가온다. 남미 칠레에서 왔다는데, 엄마와 이모와 함께였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청년이다. 그렇다고 이 아름다운 곳에 어머니와 가족을 두고 왔다고 미안해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싶진 않다. 좀 더 가벼워진 삶의 자세로 함께할 기회는 앞으로도 있으니까.

레드비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고향인 미국 브라이스 캐넌이나 그랜드 캐넌을 연상시킬 만큼 붉다. 그 아래서 커플들이 붉게 타오른다. 산토리니의 해변은 부력이 좋아서 웬만하면 가라앉지 않고 뜬다고 한다. 삶의 무게가 무거운 사람조차 삼키지 않고 띄워주는 고마운 곳이다.

산토리니가 에게 해의 진주가 된 까닭
첫날 이아 마을의 환상적인 낙조를 본 뒤 그 이상의 풍경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마지막 날 피라의 옛 항구 쪽 뒷골목을 걷다가 이아 마을 못지않은 절벽과 바다의 풍광에 또 환호하고 말았다. 이아 마을의 바닷가에서 마을까지 이어진 절벽엔 214개의 계단이 있는데, 피라의 바다 항구에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무려 566개다. 항구에서 내린 여행객들을 태우거나 짐을 실은 노새가 이곳을 줄지어 오른다. 이 보기 드문 풍경은 마치 사라진 신비의 땅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것 같았다.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정취다. 만약 현대 문명의 이기인 케이블카,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같은 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면 산토리니의 지금 모습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어찌 에게 해의 진주가 될 수 있었을까.

- 『그리스 인생 학교』 중에서
(조현 지음 / 휴 / 388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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