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이 들었다. 이 병의 시작과 진행에 대한 기억은 내가 거닐곤 하는 꿈길의 종착역이다. 거기서 계속 나아가면 잠 못 이루는 밤이 내 앞에 놓인다. 15년 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당뇨나 관절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 병을 가지게 되었다. 파킨슨병은 특유의 증상, 불안정한 약효, 끝없는 강박과 더불어 나를 지배한다. 내 병과 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치유되지 않는 병이며, 인간 본연의 의사소통 능력에 깊이 개입하는 병이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 난 내 아들은 발음이 분명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언어 능력을 부분적으로 상실한 이래 나는 아들 앞에서 자꾸 위축되었다. 반평생을 말 잘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던 만큼 언어장애가 오자 나는 사회에서 계속 발을 뺐다. 중병을 앓는 인간으로서 공적 장소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 나를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병으로 인한 나의 인성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이런 성향이 내 안에 깊숙이 숨어 있던 원래 성격이라고 하면서, 병이 우울한 도피 성향을 촉진할수록 더욱 맞서야 한다고 아들은 강력히 주장했다.

아들이 표명한 나에 대한 최악의 의심은 내가 비겁하여, 이제 병을 핑계로 내게 부여된 의무와 기대를 회피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이런 비난을 했더라면, 당신의 잣대로 부당하게 내 인생에 참견하지 말라고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들은 아버지인 내게 나 스스로를 책임지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아버지-자녀 구도 속에 이런 합법적인 기대가 끼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며, 그런 기대를 무시하면 아들에게 상처를 입힐 게 뻔했다.

몇 달 전 나는 아들과 함께 뉴욕에 왔다. 떠나오기 전에 나는 이 여행이 우리 둘의 화해 여행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건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전에 뉴욕에 교환교수로 왔을 때 동료로 지냈던 여교수가 나를 컬럼비아 대학 교수 클럽의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나는 그 모임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새 책을 소개할 겸해서 한 교수가 강연을 하는데, 이 모임에 초대를 받는 것은 굉장한 영광으로 여겨지며, 초대된 사람은 강연을 듣고 난 후 토론에 활발하게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나는 내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그 여교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일단 초대를 수락했다. 내심 내 병을 모두 알고 있으니 토론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미처 아들을 생각지 못한 게 불찰이었다. 아들은 그 여교수에게 자기도 함께 가도 되느냐고 물었고, 아뿔사! 나의 몸 상태를 아는 그녀는 아들도 함께 초대한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가겠다고 했다가 번복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또한 그 모임에서 토론될 주제에 관해서는 논문을 쓴 바 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성대한 만찬이 끝난 후, 우리는 행사가 열리는 작은 강의실로 인도되었다. 세미나는 정해진 순서대로, 먼저 강연이 있었고 토론이 이어졌다. 모든 참가자가 10분 정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강연에 화답해야 했다. 순서는 내게 유리하게도 맨 마지막이었다. 첫 토론자가 말을 시작하자, 아들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말씀을 하셔야 해요. 여기서도 움츠리시면 안 돼요. 그럼 난 아주 창피할 거예요.”

그 말을 듣자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수술로 뇌에 심어놓은 자극 발생기의 원격 버튼을 조절하여 진폭을 낮춤으로써 몇 차례 목소리를 개선한 적이 있었으나, 기기를 완전히 꺼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토론의 윤무에서 내 차례가 되기 정확히 10분 전에 나는 기기를 꺼버렸다. 졸도나 탈진으로 이어진다 해도 할 수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와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성공이었다. 약간 목이 잠긴 듯했지만 탁월했다. 최소한 내가 이야기했던 10분 동안 나는 수술 전의 신체적, 지적 능력을 갖춘 노익장으로 되돌아갔다. 달갑지 않은 부작용이 두려워 연설을 끝낸 후 얼른 기기를 다시 켰으나,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들은 내게 속삭였다.

“잘하셨어요. 봐요, 되잖아요!”

그 일 이후로, 명확하고 유창하게 말해야 할 때 버튼을 이용해 자극 발생기를 꺼두는 방법은 나로 하여금 직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했고 내게 자신감과 직업적 권위를 돌려주었다. 나는 다시금 강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강연 후 질문과 토론을 할 때는 기기를 다시 켜야 한다. 호흡 곤란이나 우울증, 패닉 상태가 엄습하기 때문이다. 신경 계통의 질병을 앓는 사람은 장기적인 약물복용을 통해 좀비가 되고, 몸에 다는 기계를 통해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이 된다. 그러나 나의 상태가 좋아질 수 있다면, 부작용 없이 활용할 수만 있다면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누군가 내게, 다른 건강한 사람이 되어 그의 몸과 마음으로 생을 살고 싶으냐, 아니면 현재 나 자신의 생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으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나 자신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치유 불가능하고 많은 제약이 따르는 질병이 발병하면 한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어갈 능력을 잃는다. 그리하여 그의 삶은 식물의 삶과 비슷해진다. 하지만 자율성도 초월성도 없는 무익한 삶, 그것은 삶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병과 함께 잘 지내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간 병을 앓으면서 줄곧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가끔씩 기쁨으로 깨어날 때도 있었다. 인생은 늘 절망적이지도 늘 행복하지만도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기쁨은 공존한다.

- 『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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