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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
 저자 : 박지원
 출판사 : -
 출판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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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허생전 외
저자 : "김시습,박지원 저" / 출판사 : 하서출판사
교보문고  BCMall     
허생전/옹고집전
저자 : 허인 / 출판사 : 가정교육사
교보문고  BCMall     

 
가까이하기엔 정조에게 너무 먼 박지원
연암 박지원의 인생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벼슬을 못해서, 《과정록》에 '책을 펴놓고 공부할 장소가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집안이 궁핍했다. 무능한 아버지 대신에 그를 키운 것은 형과 형수였다. 이렇게 불우한 연암의 인생에도 빛은 있었다. 첫번째 빛은 장인 이보천이 비춰주었다. 이보천은 연암에게 장인이면서 동시에 후견인이었고 스승이었다. 연암의 생애에 비친 두번째 빛은 열하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연암은 열하를 여행한 이후 북학파로서의 의식을 확고히 틀어쥐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했음에도 연암 역시 서른다섯 살에 과거시험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연암은 북학사상에 심취해 그 결실을 맺었는데,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당시 조선의 반항정신을 보여준 것으로 '문체반정'의 대상이었고, 이 작품 때문에 연암의 생명을 노리는 자도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글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고전과 경서를 마구잡이로 인용해서 쓰는 당시의 풍토에 비추어본다면,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쓰면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나가는 박지원의 글은 유교에 물든 일반 서생들에게 분명히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조였다. 유학자들이 연암을 벼르고 있는 상황임에도 만천하를 발아래 호령하는 정조는 1986년 연암을 선공감 감역에 임명한다. 《열하일기》의 명성을 감지한 정조가 연암을 큰인물로 인정하고 우선 벼슬길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조만큼 연암을 높이 평가한 사람도 드물다. 정조는 연암이 정치를 '지극히 잘한다'면서 극진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정조는 문체의 변질을 연암의 탓으로 돌리고 '고문과 경서를 본받은 글(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서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순수하고 바른 글'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이조판서 유언호의 추천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정조는《열하일기》를 인정해 벼슬을 주고, 동시에 《열하일기》를 부정해 연암을 질책한 셈이다.
이러한 정조의 모순된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과열된 정쟁을 억제하면서 정치세력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다. 정조는 바로 이 탕평책의 일환으로 북학파 거두인 연암을 회유해 자기편으로 흡수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연암을 질책한 것도 탕평책의 일환이었을까?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 문체를 바른 데로 돌이킴)' 정책은 결국 연암 박지원의 반골적·반항적·현실비판적 행로에 제동을 걸었을 터다. 어찌되었든 정조가 정말 연암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견제의 대상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는다. 정조는 그 답을 주지 않고 연암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북학 사상가로서의 실학자
박지원의 호는 연암(燕巖)이고 관향은 반남(潘南)이다. 20세 전후에는 우울증으로 보이는 정신질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박지원은 23세에 모친을, 31세에 부친을 여의는 등 불운을 맞았다. 집안이 본래부터 청빈했고, 가정의 법도가 엄격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벼슬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현숙한 형수가 연암을 주로 양육해 부모보다는 형과 형수에게 남다른 애정을 느꼈다.
열여섯 살 때 이보천의 딸로 동갑인 전주 이씨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연암은 장인에게 직접 《맹자》를 배우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이보천은 연암을 '매우 비범하니 반드시 훗날 큰인물이 될 것이나 너무 영특해서 걱정이다'고 평했다. 그후 처숙인 이양천과 당대의 문장가인 황경원, 김원행이 그를 가르쳤는데, 김원행도 그를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1770년 34세에 소과에 합격한 듯한데, 1771년에 돌연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 뚜렷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이즈음에 북학사상의 선구자인 홍대용을 비롯하여 이서구·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 북학파들과 학문탐구에 골몰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1776년 정조가 등극했는데, 연암의 독보적인 태도는 홍국영을 비롯한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런 차에 홍국영이 정권을 잡자 가족을 이끌고 1778년 연암협(燕巖峽)으로 피한다.
홍국영이 실각하자 1780년 서울로 돌아온 연암은 삼종형의 권유로 연행(燕行)을 한다. 이때 비로소 연암은 청나라의 실상을 접하고 이제까지 말로만 듣고 책으로만 보던 선진문물을 체험하여 견고한 북학사상을 형성한다. 이때의 기행문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이를 계기로 연암은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1780년부터 1805년 69세로 사망할 때까지 25년간은 벼슬길에 오른 인생의 안정기라 할 수 있다. 정조의 인정도 받으며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800년에 연암의 비범함을 알고 그 길을 열어주던 정조가 승하하자, 연암도 1801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1805년 10월 20일 69세로 서울에서 숨을 거두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허생은 묵적골에 살았다. 곧장 남산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한 아내는 도둑질이라도 하라고 바가지를 긁는다. 이에 허생은 기약했던 10년 공부를 7년에 그치고 거리로 나서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씨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보자 다짜고짜 돈 일만 냥을 꾸어달라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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