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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저자 : 김만중
 출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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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사루비아문고 22) 사씨남정기/서포만필
저자 : 김만중 / 출판사 :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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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저자 : 김만중 / 출판사 :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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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저자 : 김만중 / 출판사 : 태학사
교보문고  BCMall     

 
숙종의 민비폐출 사건을 모델로 당대현실을 소설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사씨남정기는 김춘택이 숙종의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경계하기 위하여 지었다"라고 썼다. 김춘택은 김만중의 증손자로 유배지에서 김만중이 쓴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한 인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씨남정기》는 목적의미를 지니고 있는 소설이다. 실상 인현왕후 폐비사건에 김만중 집안은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숙종의 첫 왕비가 김만중의 형인 김만기의 딸이었고, 그 왕비가 죽은 뒤 인현왕후가 왕비가 된 후, 김만중은 계속 인현왕후 편에 서있게 된다. 김만중은 처음 장희빈이 세력을 얻었을 때 숙종에게 간(諫)하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고, 장희빈에게 왕자가 태어나 특사로 풀려났으나, 다시 세자책봉문제로 남해로 유배된다. 뿐만 아니라 김만중의 증손자인 김춘택은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사씨남정기》의 창작시기는 김만중의 생애 중 대체로 말년에 해당하는 1689년 이후로 추정된다.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를 저작한 동기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출사건을 경계한 것과 더불어 그 저작동기의 이면에는 남해의 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과 수단을 아끼지 않았던 김만중의 의지가 투영되어있다. 인현왕후가 재입궐하고 서인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되면 김만중의 가문은 옛날의 명예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지니고 임금의 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면적으로 풍자하여 간(諫)하는 형식으로 《사씨남정기》를 저작한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김만중은 그 배수진으로 《사씨남정기》를 써서 증손인 김춘택으로 하여금 궁중에 들어가게 한다. 김춘택이 《사씨남정기》를 다시 한문본으로 옮긴 데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대궐안의 사람들과 귀족들이 《사씨남정기》를 읽어야만 숙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데, 한글로 된 소설이라면 그들이 읽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다시 한문본으로 번역하게 되는 것이다.
《사씨남정기》는 곧 대궐에 전파되었고 어느날 숙종은 궁인으로 하여금《사씨남정기》를 읽게 했다. 숙종이 무죄한 사씨를 추방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유연수를 천하에 고약한 놈이라고 욕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김만중은 인현왕후가 다시 복귀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692년에 남해의 유배지에서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된다.

숙종 때 권력투쟁에서 밀린 서인, 주옥같은 한글소설 창작
김만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요,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이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방(昉)의 증손녀이다.
김만중은 인조15년(1637년)에 생원 김인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떠난 인조가 한 달 반의 항전 끝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자살해 버렸다. 그때 그의 부인은 김만중을 임신하고 있던 중이었다. 윤씨부인은 다섯 살 난 아들 만기와 함께 강화섬을 빠져나와 친정에서 몸을 풀었는데 그가 바로 김만중이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했다. 그 뒤 1665년(현종 6)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디디기 시작하여 1666년에 정언(正言), 1667년에 지평(持平)·수찬(修撰)을 역임하였고, 1668년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교리(校理)가 됐다.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신정(申晸)·이계(李稽)·조위봉(趙威鳳)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 백성을 구휼하는 정책의 얻음과 잃음을 논하는 것)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뒤 돌아와 부교리가 되는 등, 1674년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1675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재기용된 그는 숙종5년(1679년)에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다시 조지겸 등 남인의 탄핵을 받아 좌천됐다. 그러나 숙종11년 홍문관 대제학, 숙종12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을 때 서인 김수항의 아들 창협이 비위사실에 연루되어 처형받게 된 것을 보다 못해 이를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기도 한다.
3년 후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그의 우여곡절 많은 귀양살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듬해 또다시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장씨가 왕자를 낳았는데, 이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놓고 당쟁이 일어났다. 숙종은 많은 신하의 반대를 누르고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숙원 장씨는 희빈으로 삼았다. 숙종의 이 같은 태도를 앞장서서 반대하던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자, 김만중은 강경한 어조로 숙종의 처사를 공격하고 나왔다. 이 때문에 김만중은 남인에게 탄핵을 받고 노도로 유배됐다. 이 사건은 유명한 숙종조의 사화, 기사환국이다.
김만중은 이곳에서 《서포만필》《사씨남정기》《구운몽》《주자요어》《윤부인행장》등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곳에서 자기가 파놓은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솔잎 피죽을 먹으며 근근이 연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먹고살기 위해 밭을 일구는 등 굶어죽지 않을 방도를 찾았던 다른 유배객들과 달리 김만중은 집필에만 전념하고 농사일은 안중에도 없어서 '묵고노자 할배'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김만중은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정한 한계는 있겠으나,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 예찬론'은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놀랄 만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한문은 '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견주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명철한 의식의 소산으로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김만중이 '국민문학론'을 제창했다고 할 만큼 그의 문학사조상의 공로는 매우 큰 것이다. 특히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일종의 '국자의식(國字意識)'은 중국의 언어인 한문을 숭상하던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비교할 때 대단히 뛰어난 것이다.
또한 그가 《구운몽》《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소설을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볼 때, 허균(許筠)의 《홍길동전》의 뒤를 잇고 조선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가에 대해서 뿐 아니라 소설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김만중은 소설의 통속성에 대하여 진수(陳壽)의 삼국지나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鑑),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誌演義)를 서로 구별하여 통속소설에 대한 예술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한시 시학의 표준으로 고악부(古樂府)와 《문선(文選)》의 시를 생각했다. 말하자면 율시(律詩)이전의 시를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주희의 학시관(學詩觀)과 상통하면서도 인간의 정감과 행동을 중요시하는 연정설(緣情說)을 시의 본질로 본 점은 자못 특징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363수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의 주조를 형성하는 단서로 작용했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고시계열의 작품을 애송하였던 것과도 맥이 닿고 있다. 장편시인 〈단천절부시(端川節婦詩)〉 또한 이러한 그의 주정적 시가관(主情的詩歌觀)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그밖에 그의 소설이나 시가에서 많은 인물이 여성인 점도 흥미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그의 낭만주의적 정감의 전달대상으로 곧 소설과 시가의 형식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명나라 가정연간 금릉 순천부에 사는 유희는 늦게야 아들 유연수를 얻는다. 유희의 아내 최씨는 연수를 낳고 세상을 떠난다. 유연수는 십오 세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에 제수되고, 묘혜승려를 통해 어질고 덕이 많은 사씨(사정옥)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유연수와 사정옥의 금슬은 좋으나 10년이 지나도록 사씨는 출산을 하지 못한다. 사씨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첩을 들일 것을 권유한다. 유연수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지만 여러번 권하자 교씨(교채란)를 첩으로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여자로,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증오한다. 그러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출산하고는 자기가 정실이 되려고 마음을 먹으면서 문객 동청과 결탁하여 사씨를 모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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