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경제포털
뉴스  ·  증권  ·  부동산  ·  금융  ·  자동차  ·  창업  ·  교육  ·  세무  ·  헬스  ·  BOOK  ·  블로그   
등록예정 2023년 2월 등록예정 도서요약
북다이제스트
        
아이디/패스워드 찾기
회원가입
도서요약전체

미래를 위한준비
도서상세정보
낙동강
 저자 : 조명희
 출판사 : -
 출판년도 :


a4용지 10매내외 핵심요약전문
워드파일 보기및받기 한글파일 보기및 받기 pdf파일 보기및 받기
단편소설집
저자 : 조명희 외 / 출판사 : 한국문학사
교보문고  BCMall     

 
팥죽 팔던 노적(蘆笛)이 포석(砲石)이 된 이유
조명희는 한국, 일본, 러시아를 오가면 식민지 일제의 압제에 항거한 사회주의적 경향을 지닌 작가다.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몰락해 가난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에는 빈곤한 한국 민중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그의 성장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궁핍한 삶의 풍경은 그가 한 때 했던 '팥죽장사'의 일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느날 조명희는 작가 한설야를 찾아와 극심한 굶주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조명희는 "나는 팥죽장사를 하려우. 한설야 형 생각은 어떻소?"라고 했다. 한설야는 어리벙벙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자 조명희는 특유의 침착한 정열을 풍겨내는 느린 말로 팥죽장사라는 직업에 대해 한설야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서민들을 상대로 팥죽장사를 하면서 보다 직접적인 생활체험을 하겠다는 것과 먹는 장사이니 만큼 가족들이 굶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조명희의 논리였다. 생활을 어렵게 꾸려나가는 조명희의 팥죽장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어설픈 팥죽장사는 고객이 없어 파리를 날려야 하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는 어두컴컴한 부뚜막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고, 팔리지 않은 팥죽으로 가족들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그는 과일행상, 꽃장사 등을 하면서 가족들을 책임지려는 발버둥을 계속했다.
조명희가 구슬픈 정서가 풍기는 갈피리라는 뜻의 '노적'(蘆笛)이라는 호를 버리고 굳센 의지와 신념을 상징하는 '돌을 안다'라는 뜻의 '포석'(砲石)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도 이러한 어려운 생활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다. 조명희의 작품들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최하층의 어려운 삶을 주로 다루었다. 이러한 작품경향은 생활속의 경험과 식민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울분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고 할 수 있다.카프 문학의 중심에 섰던 러시아 망명객
조명희는 1894년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병행은 19세기 말엽에 무관을 지낸 마음이 곧은 선비였으나 조명희가 네 살 되던 해인 1897년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조명희는 양반가문 출신인 어머니 정씨와 배다른 맏형 조공희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진천 일대에서 대단히 유복했던 조명희 가문은 1900년대 말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는데 조카 조벽암의 회고에 따르면 "망국의 울분과 체념, 매국의 주역이 집안 사람이었던 데서 오는 수치심 등으로 인해 집안이 몰락"했다고 한다. 조명희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13세의 어린 나이로 네 살 연상인 여흥 민씨와 결혼해 어려운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는 1919년에는 고향에서 3·1운동 시기에 마을 청년들과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구금 생활을 했다.
조명희가 인생에 있어 전환기를 맞는 것은 일본 유학시절이다. 1919년 겨울 공부를 위해 일본에 간 조명희는 동경 소재 동양대학 인도철학부 윤리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유학생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김우진, 이기영, 박영희 등과 친분을 쌓고 무정부주의 계열의 학생단체 '흑도회' 활동을 하기도 한다. 1923년 초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본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한다. 그는 도쿄 유학시절 하이네, 괴테, 타고르를 읊으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이때 집필한 시들이 귀국 후 1924년 《봄 잔디 밭 위에》라는 시집에 수록 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희는 1925년 2월 소설 〈땅속으로〉를 《개벽》(1925.2∼3)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또 같은 해 8월에 그간 교분이 있던 이기영·최승일·안석주·염상섭·최학송 등과 사회주의 문학단체인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 KAPF)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 사회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단편소설 창작에 몰두해 〈R군에게〉 〈저기압〉 〈마음을 갈아먹는 사람들〉 〈새 거지〉 등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소설 〈낙동강〉(1927)은 1920년대 한국 소설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후 그는 1928년 7월 러시아로 망명해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조명희는 중등교육과정인 농민청년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면서 산문시 〈짓밟힌 고려〉(1928)를 발표해 한인들의 문학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1936년에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해 러시아 작가동맹 원동지부 간부를 맡아 활동한 경험도 있다.
1938년 5월 11일은 조명희에게 비극적인 날이었다. 그는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일본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한 자들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 없이 사형선고를 받고 사망했다. 1956년 러시아 정부는 흐루시초프의 해빙정책에 따라 조명희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며, 작가로서의 공적을 복권시켰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낙동강 칠백 리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의 어귀에 병이 깊어 보석출감한 박성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박성운은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군청 농업조수 노릇을 하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그러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감옥살이를 하고 사회주의자로 변신해 식민지현실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박성운은 미천한 신분 출신인 지식인 여성 로사와 함께 청년회원, 형평사원, 여성동맹원, 소작인 조합 등을 조직해 국유지였던 낙동강 기슭의 갈밭이 일본인 손에 넘어간데 대해 항의하는 운동을 하게 되는데 ……
단체회원가입안내
독서퀴즈이벤트
나도작가 신청안내
무료체험
1분독서영상
한국독서능력검정 신청
모바일 북다이제스트 이용안내

인재채용 | 광고안내 | 구독신청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서비스문의 이용문의:mkmaster@mk.co.kr
회원문의:usrmaster@mk.co.kr
매경닷컴은 회원의 허락없이 개인정보를 수집, 공개, 유출을 하지 않으며 회원정보의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