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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저자 : 심훈
 출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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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저자 : 심훈 / 출판사 : 신원
교보문고  BCMall     
상록수
저자 : 심훈 / 출판사 : 서울대학교출판부
교보문고  BCMall     
상록수 (빛샘 한국 대표 문학 29)
저자 : 심훈 / 출판사 : 빛샘
교보문고  BCMall     

 
진보주의자의 열정과 예술가의 고뇌
심훈의 집안은 대체로 친일적 시류에 편승한 전통적인 양반가문 출신의 중소지주계급이었다. 특히 그의 형 심우섭은 이광수의 《무정》에 나오는 기자 '신우선'의 모델이라고 하는데, 그는 총독부 어용지 《매일신보》의 기자였다. '아무리 친형제지간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고 밝힐 만큼 심훈은 형의 사상과 행동에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조혼이 그를 괴롭혔다.
그가 16세에 결혼한 첫 부인 이해영은 당시 이해승 후작의 누이였으며 그의 누님 또한 조혼한 뒤 청상 과부가 되고 만다. 누님의 처지에 충격을 받은 그는 "아! 악마. 구수(仇讐)의 조혼아, 내 손으로 깨뜨리련다. 나의 붓이 이 원수를 죽일란다"고 절규할 만큼 조혼에 대해 격렬한 반감을 가졌다. 이렇듯 심훈은 봉건적 가정의 숨막힐 듯한 분위기에 고통받는 학창 시절을 보낸다.
심훈의 삶에 획기적 전기된 것은 3.1운동이었다. 경성제일고보 시절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게 되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민족의 대의에 눈뜨게 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린 편지, 즉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로서 '더 크신 어머님'(조국)에 대한 헌신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강렬한 동경은 심훈에게 봉건적 질곡으로부터의 개인의 해방과 밀접히 맞물렸으며, 그는 마침내 무일푼으로 1920년 겨울 중국으로 낭만적 탈출을 감행한다. 1923년 귀국할 때까지 3년에 걸친 그의 중국 망명은 그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사상적 편력을 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전기가 된다. 민족주의자 이동녕과 이시영, 무정부주의자 신채호와 이회영, 공산주의자 여운형과 박헌영 등과 두루 교류하면서 사상적 모색기에 접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그가 귀국하여 사회주의 경향의 언론운동에 참가한 점, 그리고 후에 계급주의 문학 단체인 카프의 기반이 되었던 '염군사(焰群社)'의 멤버였다는 것에서 확인된다.
그의 진보주의적 열정은 예술 활동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시, 소설, 수필, 영화, 평론,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활동 모두가 이러한 진보적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우선 그는 식민지 현실의 훼손된 세계를 극복하는데 예술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조선의 예술가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예술가를 하루살이 무리로 보는가 하면 심지어 '예술가 기생충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한 예술가를 철저히 부정하고 조선의 형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도적 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가 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비판은 당대 문학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된다.
영화배우로의 활약,〈장한몽〉의 이수일 역을 무난히 소화
한편 그의 예술적 활동은 영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923년 '극문회'의 멤버가 되면서 당시 연극, 영화계의 중요 인물들과 교우하며, 1925년 영화〈장한몽〉의 주인공 이수일역을 대역하는가 하면 1927년 일본에 건너가 영화 공부를 하고 귀국하여〈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원작, 각색, 감독했다. 1920년대의 심훈은 영화인이라고 보아야 할만큼 영화에 대해 적극적이었고, 나운규, 이경손 등 당시 일류 영화감독에 뒤지지 않을 만큼 영화에 대해 괄목할 만한 식견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심훈이 대중사회의 예술인 영화에 주목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특히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인 대중을 위해서 영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 영화의 대중문화적 의의를 고려할 때 대단히 선진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검열의 무지막지한 횡포, 제작비 문제, 자신의 생활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꿈은 끝내 실현될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영화에서 한 걸음 물러나 소설에 몰두하게 된다. 심훈의 삶은 너무나 다채롭다. 때로는 혁명의 열정에 거침없이 자신을 내던지는가 하면 카프의 공식주의적 경향에 반대하고 때로는 조혼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혼한 아내에게 지순한 사랑을 맹세하는가 하면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한 신여성들과의 화려한 염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 영화에 열광하는가 하면 돌연 소설가로 변신하고, 그리고 마침내는 도시와 결별하고 농촌으로 낙향했다. 하지만 그 다채로운 삶을 관통하는 것은 진보적 사상과 예술가적 고뇌였다. 진보적 사상은 그의 소설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특히 작품마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투쟁 방법이 선명하게 부조되어 있는데, 《동방의 애인》에는 해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불사조》《직녀성》에는 국내에서의 도시 노동운동이, 《영원의 미소》《상록수》에는 농촌계몽운동 내지 농민운동이 각각 제시되어 있다.
계몽주의자의 비극적 인식과 낙관주의
심훈의 본명은 대섭이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시인, 소설가, 영화제작 및 감독, 평론가로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01년 서울 노량진에서 출생한 그의 아버지는 면장이었고, 형은 《매일신보》기자로 있었기에 어느 정도 친일적 시류에 편승한 집안 형편과 완고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고통스런 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1919년 경성제일고보에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하면서 그의 일생에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헌병대에 체포, 투옥되고 7월 집행 유예로 풀려나나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게 된다. 감옥에서 어머니께 올린 편지의 내용, 즉 '더 크신 어머님'(=조국)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부분에서 당시 심훈의 청년기 열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21년 무일푼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항주 강지대학 극문학부에 입학한다. 원래 극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지만 포기하고, 대신 중국에서 다양한 사상 조류와 접하게 되고 그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1923년 귀국하여 당대 연극, 영화계의 중심 인물들인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임남산 등과 함께 '극문회'란 연극단체를 조직한다. 또한 초기 프로문학 단체인 '염군사'에도 참여한다.
문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24년《동아일보》기자로 입사한 뒤부터다. 명기자로 활약했던 그는 나라 없는 울분을 술로 풀었다. 매일같이 술에 취하여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귀공자 타입의 미남아였던 그를 기생들이 다투어 구애를 했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1924년 이해영과 자식 없이 이혼하고 만다.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중이던 번안소설〈미인의 한〉의 후반부를 손대기 시작한 것이 심훈의 문명(文名)이 지면에 오르기 시작한 시초다. 1925년에는〈장한몽〉의 주인공 이수일 역을 대역하기도 했고, 친구 윤석중과 같이 탈춤을 각색하려 했으나 너무 방대하여 중지하고〈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각본을 급히 만들었다.
1926년 각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이 결성한 '철필구락부' 사건과 관련되어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최초의 영화 소설〈탈춤〉을《동아일보》에 연재한다. 이 소설은 영화를 의식하고 씌어졌으며 그가 영화이론에서 밝힌 남녀간의 연애문제를 다룬 작품으로서, 제각기 탈을 쓰고 춤을 추고 있는 의식적 가면들의 군상들의 가면을 벗겨 그 정체를 드러내겠다는 의도를 작품 서문에 밝히고 있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하고 귀국,〈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원작, 각색, 감독하여 10월 단성사에서 개봉하게 된다. 1924년 조혼한 아내와 이혼하고 1926년에는 근육염으로 8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지는 등 이 당시 심훈은 개인적으로 복잡한 사정에 처해 있었는데, 영화에 전념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영화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시, 소설을 습작하고 평론 활동도 꾸준히 전개한다. 특히 평론 분야에서는 당대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민족주의문학과 프롤레타리아문학 모두를 비판하면서 대중을 위한 예술을 피력한다.
1930년《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 편의 장편소설을 연재하나 일경의 검열로 모두 게재 정지를 당한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그의 진보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게재 정지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한 신여성들과 화려한 염문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1930년 무희인 19세의 안정옥과 재혼한다.
1931년 당시로 볼 때 매우 의미있는 영화론 〈우리 민중은 어떤 영화를 요구하는가〉를 발표했는데,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가지는 대중적 예술을 위해 그가 영화를 택했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확인된다. 조선일보사를 퇴사하고 1932년 이미 양친이 내려가 있던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새로 결혼한 부인 안정옥, 장남 재건과 함께 낙향한다. 그 해 조국의 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는 시 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가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그날이 오면〉에는 아무리 잔혹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조국의 광복이라는 미래의 필연적 승리를 예상하는 그의 유토피아 지향의 낙관주의를 읽을 수 있다. 이후 창작에 전념하여 1933~5년에 걸쳐 두 편의 장편소설을 집필하게 된다.《영원의 미소》와《상록수》가 그것이다. 내용상《상록수》는《영원의 미소》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귀농 후 지식인이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상록수》다.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모집에 《상록수》가 당선된다. 상금 5백원 중 일부로 상록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1936년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1936년 《상록수》 출판일로 한성도서주식회사 2층에 기거하다가 장질부사를 얻어 대학병원에 입원하나 9월 16일 오전 8시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고등농림학교에 재학중인 박동혁과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농촌계몽운동에 참가한 뒤 00일보사에 베푼 위로회 석상에서 알게 되고 나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가정 형편 때문에 동혁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고향인 한곡리로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농촌사업을 시작하고, 영신 또한 기독교청년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청석골에 자리를 잡는다. 동혁은 농우회를 결성하고 갖가지 사업을 벌이다 친일 지주 아들 강기천과 충돌하며, 영신은 부녀회를 조직하여 생활개선에 앞장서는 한편 강습소를 열어 운영한다.
강습소 운영으로 영신은 주재소의 출두를 받게 되고 경찰소장으로부터 두 가지 주의사항을 받게 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영신은 하루빨리 교실을 만들기 위해 한낭천에게 약속한 50원의 기부금을 요구하나 기부금 강요로 걸려 주재소 신세를 지게 되고 결국 그녀는 과로로 쓰러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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