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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저자 : 이태준
 출판사 : -
 출판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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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다시읽는 이태준 13)
저자 : 이태준 / 출판사 : 맑은소리
교보문고  BCMall     
달밤 (이태준 문학전집1)
저자 : 이태준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구두 한 켤레로 노잣돈을 마련한 상허
이태준은 가난 속에서 숱한 역경을 거치며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간 인물이었다. 이미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는 열다섯 살 나던 해에 스스로 세상을 개척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원산을 향해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다. 물론 그에게 재산이나 노잣돈은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것은 친척 아저씨에게서 얻은 구두 한 켤레뿐이었다. 그 구두는 친척 아저씨가 자신의 친구에게 주려고 산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구두를 선물 받기로 되어 있던 친구는 죽고 말았고, 할 수 없이 아저씨는 가난한 이태준에게 맞지 않는 큰 구두를 넘겨주었다. 머나먼 여행길을 떠나는 마당에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그는 구두를 탐내던 한 친구에게 그것을 14원에 팔고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나 원산에 온 이태준은 밥값에 붙잡혀서 '물산객주집'의 사환으로 일해야 했다. 6개월 정도를 그곳에 머물고 공부를 위해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주인은 이태준이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아야겠다는 욕심에 놓아주질 않았다. 주인이 외출한 틈을 타서 서사를 꼬드겨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온 그는 '배재학당'에 시험을 봐서 당당히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듬해 다시 '중앙고보'와 '휘문고보' 두 군데에 원서를 제출했지만, 함께 응시하기로 한 친구가 시험 전날 활동사진을 보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중앙고보'시험을 놓치고 간신히 휘문고보에 입학할 수 있었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대느라 남들처럼 편안히 지내질 못했다. 항상 월사금(등록금) 체납자 명단에서 1,2위를 놓쳐본 적이 없고, 등록 마감일이 임박해지면 학교조차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성적은 우수했는데, 그의 사정을 알게 된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학비 면제 혜택을 받음으로써 간신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학창시절 이태준은 수학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수학시간에는 몰래 숨어서 소설책을 읽거나, 수학 선생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만화를 그리곤 했다. 그는 작문시간을 제일 좋아했으며, 체육시간에는 상습적으로 조퇴를 일삼았다. 도시락을 싸오기 어려워 점심시간이면 몰래 학교 담을 넘어가 호떡 사먹는 것을 즐기곤 했다.
휴머니즘과 낭만적 동경을 끝내 져버리지 못했던 작가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은 1904년에 태어나 22세의 나이로 1925년 7월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와, 6·25 직후까지 약 30년에 걸쳐 단편 60여 편과 중·장편 18편을 발표한 한국 현대소설사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우리나라 소설계에서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최초의 기수이자 김동인이나 현진건의 뒤를 이은 근대적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월북작가라는 굴레 때문에 이데올로기와는 관련이 없는 작품들까지도 부정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는 '구인회'의 실질적인 좌장격을 맡아 1930년대 순수문학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으며, 잡지 《문장》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제 말에는 《왕자호동》을 마지막으로 절필하였다가, 해방 후 임화 등과 함께 좌익 문학 단체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문협)에 가입하면서 1946년 7월 월북하여 《해방전후》, 《고향길》, 《농토》등의 사상적으로 편향된 작품들을 저술했다.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아버지 이창하(李昌夏)와 소실이었던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 安氏)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자(字)는 문교, 호는 매헌(梅軒)으로 덕원 감리 주사를 지낸 하급 관리였지만,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인《사상의 월야》에 의하면, 당시에는 상당한 지식층에 속했던 사람으로, 나라를 개혁하려는 일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늘상 자신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분이라는 사실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부친으로 인해 1909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으나 얼마 후 부친은 '웅기에서 들어온 행인에게서 무슨 소식을 듣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병이 돋혀' 그 해 35세를 일기로 이국땅에서 죽고, 일가는 다시 철원으로 돌아오다가 어머니의 분만으로 도중에 함경북도 배기미(梨津)에 정착하여 음식점을 경영했다.
그러나 3년 후 이태준의 나이 9세 때 그의 어머니마저 죽게 되어 그들 세 남매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그 후 상허는 고향의 친척집을 떠돌며 살다가, 1918년 사립 봉명학교를 졸업한 후 "자기의 세상을 자기 손으로 개척하자"는 굳은 결심으로 무작정 집을 떠나 원산에서 한 물산객주집의 사환으로 고생스레 일하다가 1920년 서울로 상경하여 배제학당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금이 없어 등록을 못하고, 다음 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휘문학교 시절에 이미 그는 문학가가 될 것을 마음속에 굳게 다짐하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4학년 1학기에 동맹휴교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하고, 이어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도쿄에서의 생활도 가난과 병고, 고독감으로 가득찬 암담한 생활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오몽녀〉를 집필하여 《조선문단》에 입선한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1927년 11월 일본 상지대를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여러 신문사와 모교인 휘문고보에 취직을 의뢰했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모국에서 마음껏 펼쳐보리라 기대했던 이태준은 심한 좌절을 겪게 된다. 이 당시 상황은〈고향〉과 〈실락원 이야기〉라는 작품에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1929년, 25세 때 드디어 《개벽》사에 입사하면서 창작 활동을 재개한다. 1930년 5월에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면서, 단편 소설〈결혼〉,〈장마〉,〈토끼 이야기〉등을 통해 결혼에 관한 내용과 가난의 고통을 그렸다. 그 후 《중외일보》 기자와 《조선중앙일보》학예부장으로 일하는 한편, 지금까지 카프가 주도해 온 비문화적 정치주의에 반대하고 예술성을 중시했던 '구인회'에 참가하고 이화여전 등에 출강한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으며 훤칠한 키에 잘 생기고 깨끗한 인상 때문에 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따랐다. 이 시기 그는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얻고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고 훗날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여러 단편과 신문장편소설을 써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고 문단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해방 후 그는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지금까지의 순수문학 활동과는 전혀 다른 활동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해서 이태준이 좌익 계열로 넘어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해방전후》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이태준의 이해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소박한 이상주의에 근거했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다. 이태준의 작품 세계는 이미 1937년을 전후로 현실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 바 있으며, 이후의 행동도 이전의 이상적 세계관이 그 대상을 바꾸어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태준의 리얼리즘관이 매우 소박한 인식 위에 구축된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북한에서 겪어야 했던 비극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결국 사상적인 문제로 비판을 받아 1956년 숙청당하여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1957),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노동자(1958) 등으로 전전하게 된다. 1950년 동란 중에 이미 남으로 귀순할 것을 도모했으나 실패한 바 있는 이태준에게 북의 현실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60년대 말까지는 살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태준은 가족을 모두 데리고 월북했기 때문에 그가 살던 성북동 집은 현재 서울시로부터 지방민속자료 제11호 '한옥'으로 지정되어 그의 생질녀(누님 정송의 딸) 이애주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서울 서대문 거리 안에 살던 '나'는 문밖인 성북동으로 이사온다. 여기서 '나'는 신문 보조 배달부로 찾아온 황수건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조금 모자라면서 순박한 사람이다. '나'는 남들이 다 노랑 수건이다, 반편이다 라고 무시하는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황수건의 평생 소원은 '월급을 이십여 원 받고, 신문사 옷을 입고, 방울을 차고 다니는 원배달(보조가 아닌 정식 배달원)'이다. 마침내 그가 배달하던 성북동이 따로 한 구역이 되어 그에게도 원배달의 기회가 오지만, 사흘 후 막상 방울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나'의 집으로 뛰어들어 온 것은 황수건이가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이다.
거의 잊어버리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찾아온 황수건은 삼산학교에 다시 들어가려고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황수건은 원래 삼산학교에서 급사로 있다 쫓겨난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돈만 있으면 '그까짓거' 급사 노릇이나 하겠냐고 하는 황수건에게 '나'는 그의 말대로 삼산학교 앞에 가서 참외 장사라도 해 보라고 돈 삼 원을 준다. 여름 내내 황수건을 만날 수 없었던 '나'에게 들려온 소식은 참외 장사를 하긴 했는데 장마가 들어 밑천만 까먹었을 뿐만 아니라, 기어이 그의 아내가 달아나기까지 했다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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