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지음/황금나침반/328쪽/9,800원)

러스크 인스티튜트 9층에 있는 러스크 박사의 집무공간에는 온 벽면이 인형으로 가득 찬 방이 하나 있었다. 일명 '닥터 러스크의 인형의 방'이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내 입에서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말 그대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인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가장 흔한 테디 베어에서부터, 도자기로 만든 귀여운 아기 인형, 디즈니랜드의 캐릭터 인형, 금발의 늘씬한 8등신 바비 인형들도 있었다. 가장 많은 인형은 각 나라의 민속의상을 입은 에스닉 인형들이었다. 독일, 아시아, 일본, 멕시코, 영국, 이집트, 아일랜드, 포르투칼... 수많은 인형들 틈에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한국 인형을 찾다가 마침내 신랑각시 인형을 찾았다. 그 옆에는 당시 유행하던 못난이 인형도 있었다.

이 방은 러스크 박사에게 도움을 받은 전세계 수많은 재활 환자들이 그에게 보낸 인형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처음에 그들이 보낸 것은 인형만이 아니었다. 집무실이 온갖 종류의 선물들로 넘쳐나자 러스크 박사는 한 가지 당부를 하게 되었다. "혹시라도 저에게 감사의 선물을 보내고 싶다면, 작은 인형 하나만 보내주세요. 그것으로 고마움을 간직하겠습니다." 그 후로 전미에서, 아니 전세계에서 러스크 박사의 인술에 화답하는 인형들이 끊임없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인형의 공간은 점차 넓어졌고 1,200개가 넘는 인형이 그 방을 가득 메우게 되자 마침내 러스크 박사 자신이 인형들에게 그 방을 양보하고 다른 방으로 쫓겨가야 했다. 러스크 박사의 인형의 방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는 러스크 박사를 먼 발치에서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그의 노력으로 재활의학이라는 것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재활의학에 뛰어들었던 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척수에 손상을 입은 군인들은 요도가 막히거나, 호흡기관이 감염되거나, 욕창 등으로 몇 주만에 사망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러스크 박사 밑에서 배운 여러 의사들과 물리치료사들이 나를 살렸으니, 그가 나에게 인생을 다시 쓸 기회를 준 셈이었다.

나는 깁스와 부목에 고정되어 있는 몸으로 비서에게 러스크 박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고, 드디어 러스크 박사의 인형의 방에서 그와 약 15분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미 팔순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내 손을 힘차게 잡으며 말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때까지 나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따지며 하늘을 원망했었다. 누군가를 불구로 만들어야만 했다면, 그것이 하늘의 뜻이었다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나를 고르셨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하나님이 아니었다. 서머솔트를 하다가 목뼈를 부러뜨린 건 분명히 내가 한 일이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은 내 옆에서 내가 뛰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내 몸을 좀더 높이 띄울 수도 있었고, 가까스로 손으로 땅을 짚게 하여 큰 사고를 피하게 할 수도 있었는데 왜 하나님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셨을까? 왜 막지 않으셨을까?

인형의 방에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님은 저 수많은 인형들처럼 내가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오로지 체조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겠다는 일념에 목숨을 거는 이승복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새롭게 일어서는 이승복, 혼자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사람들과 함께 서로 기대며 어려운 장애물을 씩씩하게 뛰어넘는 이승복,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나를 다치도록 그냥 내버려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후에는 더 큰 계획을 준비해두고 계신지도 몰랐다.

얼마 뒤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을 읽었을 때,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의 고통스런 재활훈련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책은 나에게 의학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그가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라는 걸 알고 더욱 큰 감동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엄청난 수의 전쟁 장애자들이 쏟아져나오자 그는 1954년 한미재단의 단장으로 아내와 함께 수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의료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던 내게 의학은 구원의 횃불처럼 밝게 타올랐다. 꿈을 잃어버렸던 내 가슴에 새로운 설렘이 찾아왔다.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소리를 들었다. 닥터 승복 리, 장애인 의사 닥터 리....... 건조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마음에 희망이 생기자 마치 무생물인 석상에 초록빛 영혼이 스며드는 것처럼, 내 몸이 천천히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지마비 장애인의 몸으로 어떻게 의사가 될 생각인지, 과연 나를 받아줄 의대가 있을지, 받아준다 해도 과연 내가 그 어려운 공부를 해낼 수 있을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려면 의대에 가야 했고, 의사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올림픽 꿈이 된 것이다.


* 이 이야기는 촉망받는 올림픽 체조선수에서 사지마비 장애인으로, 하버드 의대 인턴과정 수석졸업을 거쳐 세계 최고의 존스홉킨스 병원 수석 전공의가 된 슈퍼맨 닥터 리의 감동적인 인생 드라마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중에서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