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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업(業)의 발견과 기술지도의 활용
(김종현 지음/삼성경제연구소/112쪽/5,000원)

기술의 진화는 본래 기술 고유 기능의 첨단화를 의미하지만, 때론 얘기치 못한 기술 수요의 발견으로 새로운 사업 영역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가 신기술을 활용하여 신사업 영역을 찾아내는 데 유용한 도구가 바로 기술지도이다. 미국 미래연구소의 설립자인 폴 사포는 미래 유망 사업 발굴에 있어 기술지도의 유용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기술지도는 자사 산업 영역 내 기술과 다른 산업 영역 기술간의 상관관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기술지도의 좌상한에는 정보 기술(IT), 좌하한에 바이오(Bio), 우하한에 에너지, 우상한에 재료 산업이 위치해 있고 이들 산업 내 기술의 연관 관계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선과 선이 교차하는 중간에는 기존 기술의 융합으로 발생되는 새로운 기술 영역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 기술지도는 단지 기술지도의 개념을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최대한 간략하게 그린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업이 기술지도를 활용하여 신사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과 타 업종 기술과의 관련성을 상세하게 나타낼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만약 바이오 기업이 이 기술지도를 활용하여 자사 기술을 활용할 신사업을 찾는다고 가정하면 바이오와 에너지 업이 결합된 바이오 연료, 바이오와 정보 기술이 결합된 생체공학, 바이오와 재료 과학이 결합된 분자제조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개념적 수준의 제시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업이 보다 효과적으로 기술지도를 활용하여 신사업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업종별로 세부적인 기술규격과 수요를 파악하여 자사 기술과의 적합성 등을 분석하는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술지도를 활용하여 신사업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기업으로는 일본의 제온(Zeon)이 있다.

제온은 1950년 미국의 굿리치 화학 회사의 기술을 토대로 설립된 염화비닐 제조 회사이다. 제온은 1959년에 합성고무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이후 각종 화학용품과 자동차 엔진 벨트, 연료 호스 등 특수고무 사업을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던 중 주력 사업인 염화비닐 시장이 1990년대 중반 들어 포화 상태에 달하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창립 이후 순탄하기만 했던 회사의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경영난 타개책의 일환으로 1995년에 염화비닐 사업을 본사에서 분리해 스미토모 화학공업과 사업을 통합했지만, 포화된 시장 상황을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당시 나카노 사장은 더 이상 사업을 존속시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연간 12만 톤의 염화비닐을 생산하던 구라시키 시에 소재한 미즈시마 공장을 2000년도에 과감하게 철거했다. 모든 임직원들이 창업 사업을 잃어버린 슬픔에 눈물을 흘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회사를 지탱해주고 있던 특수고무 사업도 언제 그 수명을 다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염화비닐 사업을 잃은 제논이 살길은 그야말로 회사를 기사회생시킬 만한 신사업을 찾는 일밖에 없었다.

그때 나카노 사장은 ‘일본의 화학 메이커는 주원료인 석유를 절대적으로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의 거대 기업을 상대로 살아남으려면 앞선 기술로 독창적인 상품을 개발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하기엔 너무나 위험하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도전해볼 만한 새로운 것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회사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역량을 가지고 할 만한 새로운 사업을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한 가운데 기술 개발진의 눈에 띈 소재가 바로 C5유분(溜分)이다. C5유분은 제온이 에틸렌을 제조할 때 나프타로부터 얻는 부산물 중의 하나인데, 그 동안 별다른 쓸모가 없어 거의 사용하지 않던 물질이었다. 1990년대에는 C5유분으로부터 "시클로 올레핀 폴리머(COP)"라는 특수 소재를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지만, COP를 필요로 하는 적당한 수요처가 없어 그 기술 역시 거의 사장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술진은 그때까지 무용지물이었던 COP가 당시 개발되었던 다른 어떤 수지보다 물성이 훨씬 뛰어난 점에 착안해 COP를 활용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기술진은 몇 개월에 걸친 작업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때 돌파구로 활용한 방법이 바로 기술지도였다. 연구원들은 COP소재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합성수지를 활용하는 인접 산업의 기술지도를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제온의 기술진이 찾아낸 아이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카메라용 렌즈다. 시제품으로 제작한 COP 렌즈는 유리 렌즈와 비교하여 투명도에 손색이 없는데다 소재가 가벼워 성형하기도 쉬웠다. 게다가 소재 자체는 유리보다 고가이지만 사출성형기를 사용해 쉽게 가공할 수 있고, 유리와 같은 연마 공정도 필요 없기 때문에 제조 원가는 반대로 매우 저렴했다.

이 점을 간파한 일본 굴지의 카메라 제조업체인 캐논은 제온의 COP 렌즈를 자사의 콤팩트카메라에 전격적으로 채택했다. 대량 납품 실적이 전혀 없었던 제온의 제품을 캐논과 같은 대기업이 주문했다는 사실은 당시 업계 관행상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 신화의 서막에 불과했다. 제온은 콤팩트카메라 렌즈 생산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시장이 막 성장할 조짐을 보이던 휴대전화용 디지털카메라 시장에도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탄생한 디지털 부품이 바로 휴대전화용 디지털카메라 렌즈다. 지금은 누구나 가지고 다니는 디지털카메라폰, 일명 디카폰의 소형 렌즈에 COP라는 특수 수지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COP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회사가 바로 제온이다.

당시 소형화, 경량화가 최우선 해결 과제였던 휴대전화 업체로서는 제온의 COP렌즈가 가뭄에 단비와 같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제온은 디카폰용 카메라 렌즈 제조를 위한 원재료를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제공할 뿐만 아니라 렌즈를 직접 가공해 반제품 형태로도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고객이 원료를 요구하고 있는지, 반제품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 시장의 특성에 맞춰 제조와 판매를 함으로써 시장 지배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제온이 포착한 COP의 또 다른 용도는 바로 액정 디스플레이나 플라스마 디스플레이와 같은 박형 텔레비전이다. 일반적으로 액정 디스플레이 패널은 수분을 흡수하면 패널이 휘어져 화면이 일그러지는 현상을 보인다. 특히 화면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COP는 폴리카보네이트나 아크릴계 수지 등의 경합 소재에 비해 수분의 흡수성이 현격히 낮다. 그래서 COP를 소재로 만든 광학 필름은 액정 화면의 형광관의 빛을 화면 전체에 균일하게 확산시키는 도광판이나 확산판 등의 소재로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LCD나 PDP와 같은 박형 텔레비전 제품에도 COP는 없어서는 안 될 부품 소재가 된 것이다.

이후 제온은 C5유분으로부터 COP뿐만 아니라 천연고무에 지극히 가까운 성질을 가진 이소프렌 고무나, 재스민 향기가 나는 합성고무와 같은 고기능 소재 등으로 활용 분야를 확대했다. 그야말로 제온은 합성고무 제조 공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C5유분에서 금맥을 찾은 것이다. 이로써 제온은 본업에서 개발된 기술을 전용하여 첨단 디지털 제품에 들어가는 정밀 부품을 만드는 신본업(新本業)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 제온의 사업 구조를 보더라도 높아진 COP 사업의 위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2000년까지만 하더라도 적자를 보이던 COP 사업은 2001년 이후 흑자로 돌아섰고, 2004년을 기점으로 기존 특수고무 사업의 매출 규모를 넘어섰다. 경영 실적도 대폭 개선돼 2004년도 매출액은 2,133억 엔, 순이익은 46억 엔으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제온은 이미 예전에 염화비닐 공장이 있었던 미즈시마에 40억 엔을 투자해 연간 1만 5,000톤 규모의 COP 생산 시설을 신설했고, COP와 같은 고기능 수지 사업에 대규모 연구 개발비를 쏟아 붓고 있다. 나카노 사장은 한마디로 “COP 사업은 이제 제온의 기둥이다.”라고 까지 단언하고 있다.

제온이 신본업을 창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당시 IT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미리 알고 COP를 디카폰용 카메라 렌즈뿐만 아니라 대형 박형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도광판이나 확산판 등의 용도로 개발하겠다는 발상을 남보다 먼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온이 C5유분에서 COP를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사업에 성공하기까지는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COP사업은 오랜 기간 꾸준히 기술과 용도를 개발한 노력의 산물이지 하루아침에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성공한 사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창업 사업이라 하더라도 과감히 포기하고 거기에서 남는 자원을 꾸준히 재투자함으로써, 제온은 염화비닐 제조업체에서 오늘날의 렌즈 및 광학필름 제조업체로 변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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