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틸리히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대학원 시절, 그의 책 『존재에의 용기 The Courage to Be』를 읽으면서였습니다. 현대인의 불안, 무의미성, 죄성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신학에 거의 문외한이었던 제게 “신학이 이렇게 명쾌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존재론적 개념들을 사용합니다. 바로 본질(essence), 실존(existence), 그리고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가 그것입니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본질), 타락한 상태 안에 있는 아담(실존),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새로운 존재)이라는 세 가지 시간적 상태 중 ‘본질’은 존재의 근원 또는 존재의 힘인 하나님과의 일치의 상태에 있는 본질적인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본질은 그 잠재성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이지요. 그 다음으로 ‘실존’은 본질이 그 잠재성을 실현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현실적 세계 안에서의 존재의 상태, 즉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틸리히는 이 상태를 ‘자신의 본질적 존재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존재’는 실존의 상황 아래에 서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 존재와는 다르고, 또한 그것이 본질적 존재를 왜곡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존적 존재와는 다릅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간격과 분열을 극복하는, 실존적 상황 내의 본질적인 존재’라고 정의될 수 있겠지요.

틸리히에 따르면, 새로운 존재는 인간을 창조 이전으로 되돌리는 해답이 아니라, 왜곡되고 타락한 옛 존재를 새롭게 하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인간의 상황을 분석할 때, 틸리히는 본질과 실존의 구분을 경감시키는 ‘헤겔주의적 해답’을 배격합니다. 헤겔은 인간의 소외는 극복되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존재와 화해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의 하나의 표현일 뿐 본질의 타락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적 역사해석은 틸리히에게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틸리히는 역사는 분열, 절망, 그리고 파괴로 가득 찬 비극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인간은 실존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다고 진단합니다.

틸리히는 이러한 비극적 전이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인간의 유한한 자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유임에 반해 인간은 유한한 자유이므로 제약과 운명으로 다가오는 유한성 안에서만 그 잠재성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세계와 자신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인 명령을 수용하고 응답할 수 있을 만큼, 상상과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심지어 자신에게 반대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이 유한한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본질적 존재로부터 또 ‘존재 그 자체’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가져오기에 비극적인 것이나, 이것이 단순히 악마적인 것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전이가 ‘아직 존재가 아닌(not-yet-being)’ 단순한 잠재성의 상태를 극복하게 하는 창조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이를 두고 “‘꿈꾸는 무죄성’의 보존과 ‘야기된 자유’의 실현가능성 가운데서 본질적 존재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며, 이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으로 상징됩니다.

본질적인 창조는 선한 것이나 인간이 선택한, 소외된 실존과 동일시되는 현실화된 창조까지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틸리히는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세 가지 소외의 상태를 언급하는데, ‘불신앙(unbelief)’, ‘휴브리스(hubris)’, 그리고 ‘정욕(concupiscence)’이 그것입니다. 불신앙이란 ‘인간이 자신의 전 존재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행동 또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휴브리스는 ‘인간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인간의 자기높임’을 말하고, 정욕이란 ‘불신앙과 휴브리스를 일으키는, 욕망이 무제한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적 리비도나 권력과 부에의 의지 등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욕망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인간의 상태는 창조적인 선함과 모순되는 자기파괴를 향해 달려갑니다.

‘파괴적 구조’ 속에 있는 인간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시간, 공간, 인과성, 실체에 내재한 불안으로부터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종교, 율법주의, 금욕주의에서 시작해, 마침내 신비주의라는 육체적, 정신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자각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합일을 도모하는 시도까지 다해봅니다. 그러나 실존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는 절망에 이르게 된 인간은 고난과 재난, 고독, 회의와 무의미성에 빠져 자살까지 생각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들의 본질적 존재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상실한 일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새로운 존재를 요청하는 것 외에는 의지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은총만이 우리의 상실한 일치를 회복할 수 있기에 인간은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갈망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기구원의 시도들은 계시적인 측면들을 전제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물음이 생기는 곳에는 비록 단편적이지만 이미 구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말합니다. “새로운 존재의 추구는 새로운 존재의 현존을 전제로 한다.”

기독교 메시지에 따르면, 그리스도(구원자)인 예수는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입니다. 복음을 쓴 저자들은 그리스도인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자신의 옛 존재를 물리쳤다고 증언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역설적입니다. 하지만, 틸리히에게 있어서 역설이란 단순히 변증법적인 것, 무의미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메시지의 설명 불가능성이나 그 신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역설이란, 인간의 자기 이해나 예견, 기대들에 역행하는 새로운 실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인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가 가지는 그 역설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폴 틸리히의 신학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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