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비우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마음의 실체를 알아차리면 하나님과 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비움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 이유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마음 알아차리기’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참 자기를 발견하게 하고 완성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숨결 안에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고 우리의 마음에 형성된 상처나 왜곡된 관념, 감정들이 치유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과정은 자아의 거짓된 모습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아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다양한 가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윤리나 도덕적인 행동 자체가 영적 완성의 길이라고 착각하여 자만심에 젖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율법적 사고에 젖어 지나치게 낙심하기도 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나태해지거나 교만해지지요.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훈련을 하게 되면 이 거짓자아를 하나님께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또한 그분이 그 재료들을 가지고 생명으로 변형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수련의 초기에는 양심성찰과 의식성찰이 거짓자아의 가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악습이나 고정관념, 왜곡된 감정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면 무의식성찰로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따로 시간을 내서 기억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습니다. 양심성찰과 행위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영성수련이 가진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른 의식성찰에 기초하지 않을 때는 동기와 무의식의 세계를 무시하고 자기위선에 빠지게 할 염려가 있습니다. 선행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에 의한 열매’라는 측면을 도외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성찰과 관련하여 중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것은 그림자(shadow)입니다. 그림자는 자아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공의 한 면이 강하게 빛을 받으면 그 반대되는 면은 상대적으로 어두워지는 것 같이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도덕적 선과 의를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이나 착하게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납득지 못할 정도의 충격적인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 그는 자기 자아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가진 본성이 갑작스럽게 의식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의식하지 못하고 숨겨진 그림자는 억압된 상태에서 부정적 에너지를 키우고 있다가 기회를 만나게 되면 갑자기 의식을 뚫고 나와 사람을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되게 합니다. 그림자가 계속 억압되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며,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부정적인 모습이 강하게 부각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에 대한 격한 감정적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어둡고 악한 모습은 자아의 그림자인 자신의 숨겨진 어둠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림자가 외부에 투사될 경우 분노나 좌절 등 인간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최근의 영성수련은 심층심리학이 가진 이러한 측면을 받아들여 전통적으로 행하던 금욕적이고 율법적인 수련의 틀을 벗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때 그림자는 영성수련의 중요한 재료가 되는데, 그림자를 인식하고 그것을 창조의 빛 앞으로 가져오는 순간 그 내용들은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체험을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성찰하는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자기 마음의 경향 혹은 동기가 기본적으로 우리 허물을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무의식적 욕구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단이나 선택의 행위가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인지 아니면 멀게 하는 것인지, 혹은 자기의 정체성을 성장하게 하는 것인지,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물론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는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슬로우의 인간의 5가지 기본 욕구 이론은 이러한 성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이 요소들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무시되면 정신적 이상현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의 민중들, 가난하고 고통받고 인간의 기본 욕구를 채울 수 없던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행위를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죄나 결점의 동기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채울 수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죄는 더 이상 한 개인의 행위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동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공동체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와 타인의 어떤 이상행동을 접할 때 그 행동 자체만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 원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불안한 마음의 실체이고, 그 불안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안, 고독, 슬픔, 외로움, 홀로 남은 느낌, 두려움, 공허감, 안전에 대한 의심, 자괴감, 열등감 등을 성찰하여 주님의 빛 앞에 고백하고, 그 감정과 욕구들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 『행복한 영성수련』 중에서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