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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나이 마흔에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국립 예술대학의 교수였고, 소설가였고, 라디오 문화 프로그램의 진행자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서울에 내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가 있었고, 권위 있는 문학상들을 받았고, 개중에 몇 권의 소설은 해외에서도 출판되었다. 밟으면 으르렁거리며 달려나가는 힘 좋은 승용차도 있었고 묵직한 오디오 시스템도 갖추었다. 그리고 그 무렵, 한 일간신문으로부터 연재소설 제의도 받았다. 좋아요, 합시다. 하죠, 뭐.

한마디로 부족한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내 삶은 실로 숨막히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허둥지둥 일어나 차를 몰고 학교로 갔다. 제법 좋은 차였지만 늘 막히는 내부순환로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거기선 모든 차가 평등했다. 날마다 좁고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힌 채, 서서히 싹을 틔우며 자라나는 폐소공포와 싸워야 했다.(…) 저녁이면 젖은 비옷 같은 영혼을 추슬러 여의도로 향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해치울 수 있는, 괴테 식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을 단 1밀리미터도 ‘고양’시키지 않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나면 밤 11시였고 아파트 주차장을 몇 바퀴나 돌다가 겨우 이중으로 차를 대고 집으로 기어올라가면 자정이 다 돼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잠도 쉬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장편 연재는 무리 아니야? 아내가 물었지만 나는 걱정 말라고, 다 해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돼. 나는 잘나가는 벤처기업의 CEO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아내가 다시 말했다. “학교를 그만둬. 방송도 때려치우고.” “그럼 어떻게 먹고살지?” “어쨌든 너무 힘들어 보여. 아직 젊을 때, 좀 더 소설에 집중해.”(…)

나는 밴쿠버의 UBC대학으로 1년 동안 머물며 소설도 쓰고 학생들과 한국문학에 대해 세미나도 하겠으니 초청장을 보내달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초청장이 왔다. 이삿짐이 창고로 실려 떠나고 박스 몇 개를 밴쿠버로 미리 부치고 우리는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집이 팔린 것은 5월 중순인데 밴쿠버는 8월초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두 달 반 동안 어디서 뭘 하지? 아내가 물었다. 이탈리아에 가자. 이탈리아 어디? 시칠리아, 시칠리아에 가는 거야.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하필 시칠리아야? (…)

아드리아 해에 면한 항구 도시 바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밤이 깊어 페리가 떠날 준비를 마치자 승객들은 짐을 챙겨 보세 구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곳 전광판에는 영어로 ‘Memory Lost’라는 문구가 거듭하여 점멸하고 있었다. 짐작컨대 ‘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기억해보세요’쯤 되는 경고를 하려던 것 같았다. 그것은 라틴어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와 같은 구조를 가진 문장이었을 것이다. ‘기억 상실’ 혹은 ‘잃어버린 기억’ 정도로 읽힐 ‘Memory Lost’가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짐을 점검해보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날, 건달의 세월을 견딜 줄 알았고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내가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

Memory Lost.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페리는 이탈리아를 떠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 옛날 그 도시에서 한 사내가 동쪽으로 가면 황금의 도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설을 믿고 길을 떠났다. 내가 탄 배는 그의 이름을 좇아 선명을 지었다. 마르코 폴로, 그는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는 대신 자기가 보고들은 진기한 것들을 적어 남겼다. 타고난 상인이자 여행가인 그와 달리 어쩔 수 없는 먹물에 책상물림인 나는 ‘보고들은 진기한 것들’에 더하여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는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으로 흘려보낸다. 나도 다시 흘러간다. 그 어디론가.

-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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