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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정보다 잔정이
"아가씨, 미안합니다. 냄새가 좀 날 겁니다."

옆자리에 신사 한 분이 타더니 날 돌아보며 건넨 말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택시 합승이란 결코 유쾌하지 않다. 더구나 탑승한 술주정뱅이가 뒷자리의 여성에게 수작을 건넨다 싶어 아가씨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코대답도 하지 않았다. 몸살기운이 있는 데다 눈바람 속에 차를 잡느라 한동안 얼었던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감기가 있을 때마다 유난히 민감해지는 내 후각은 고약한 술 냄새와 비린내에 몹시 역겨워졌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좀 머쓱해졌는지, 나란히 앉은 택시기사와 수작을 건넨다.

"한잔하고 나니, 마누라한테 미안해서 통닭 한 마리를 샀지." "손님은 착한 남편이군요." 기사의 말이었다. "두 번만 착했더라면 마누라 쪽박 채웠게요. 나같이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하는 마누라가 불쌍해지기도 하고, 또 나 혼자 마신 것이 맘에 걸려서 산 거죠. 그렇지만 이 걸 가지고 들어가서 자는 애들과 마누라를 깨워 먹이면 어찌나 잘 먹는지, 그게 그리 보기 좋아요. 가끔 도시락이나 통닭을 사다 주지요."

참으로 감동적인 얘기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락 없이 마구 합승시키는 기사가 미웠고, 늦은 밤 시간 술 냄새를 합승하는 주정뱅이, 그 주정뱅이가 아무에게나 건네는 수작이라 여겨 몹시 불쾌했었는데, 뿐만 아니라 닭고기 비린 냄새와 엉킨 술 냄새가 뒷자리에 앉은 내게로 넘어오는 것 같아 차창이라도 밀어젖히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감기 기운만 없었다면, 기분 나쁘다는 표시로 창문이라도 열어버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불쾌감이 싹 가셔버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얘기를 들은 뒷맛처럼 깊은 감동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 신사가 내리고 차가 미끄러운 밤길을 더듬어 집까지 오는 동안, 나는 사람 사는 아름다움,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발견한 기운이었다. 어질고 순한 사슴 같은 남편. 온종일 싫은 일 궂은 일 열심히 하며, 이리저리 뛰고 달리면서, 원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에 없는 너털웃음으로 술대접하며 아부를 해야 했고, 그러는 자신이 싫어지고 미워져 마음에 내키지 않은 술을 더 마셨을지도 모르지. 그리고는 이 늦은 밤 시간, 비로소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눈바람 속 미끄러운 거리를 더듬으면서 지어미를 생각하는 남편, 어린 자식을 잊지 않는 아빠의 본분을 의식하다니.

어쩌면 이 선량한 가장은 지난날을 잊지 않았으리라. 무한의 가능성과 꿈과 포부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초라한 총각 시절, 아리따운 처녀였던 아내를 꾀느라고, 실현 불가능한 공수표를, 헛된 맹세를 남발했을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그런 헛맹세는 헛맹세와 거짓이 아니라, 꿈이 화려하고 야망이 큰 순수한 청년의 참 소망과 진실이었을 게다. 다만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 실현되지 못했을 뿐. 비록 실현되지 못하여 아내를 고생시킨다 해도,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닐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그의 탓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한 여성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한 남성이 바친 맹세란, 세월이 흐른 다음 그것들이 헛것으로 되었다 해도, 맹세하던 그 순간 진실했기에 결코 거짓이라 할 수 없으며, 비록 거짓 맹세였다 해도 오히려 아름다움까지 지녔다고 하리니, 세상에 어느 남성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온갖 호사를 해주고 싶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마도 그때의 그 약속을 이루어 주지 못 한 것이 늘 미안스러워, 오늘밤 술기운에도 처자식을 위하여 통닭 한 마리를 사들고 자랑스레 대문을 두드릴 수 있었으리. 이 남편의 아내야말로, 전날의 모든 거짓 맹세를 나무라긴커녕 감미롭게 추억하고 싶으리라. 모름지기 아내란 이름의 여자는 남편의 잔정에 감동해야 행복할 수 있고, 그래야 그녀의 가정은 화평하고 가족도 행복해질 수 있으리.

지금쯤, 그의 가족들은 잠결에 일어나 이마를 맞대고 닭고기를 뜯으며, 얼마나 겨운 행복에 웃고 떠들까? 맛있게 먹는 처자식을 바라보는 가장의 눈길 또한 얼마나 그윽하고 흐뭇할 것인가. 아마도 아빠와 남편의 이런 잔정으로, 그 따스한 가정의 애정으로 그의 가족은 이 추운 겨울도 따뜻이 지내리라.

소시민의 행복, 소시민의 생활이란 바로 이런 잔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술 마신 기분으로 보석반지를 사다 주는 남편보다는 따스한 호떡 한 봉지를 사 들고 들어오는 마음씀이, 식기 전에 가족에게 먹이고 싶은 선량한 가정의 잔정이야말로 소시민의 가정을 밝히는 아늑한 불빛이 되리라.

뜻이 높고 원대한 남성도 거룩하고 위대하지만, 마음이 여리고 꿈이 작아서 욕심 또한 작은 남성, 그래서 한 가정에 가장 노릇을 충실히 하기에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이 가난한 남성도 훌륭하다. 남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분수껏 살고자 애쓰며, 성실을 다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허황된 것에 뜻을 두지 않는 남성, 어찌 보면 남자답지 못하고, 드센 여자보다 나약해 뵈는 그런 남성을 지아비로 섬기는 여자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탐욕이 없으니 마음속에도 빈자리가 적고, 물질로 채우지 못하는 자리마다 잔정으로 마음씀으로 채울 수 있으니, 번쩍번쩍 차리고 살지 못하는 측은함이 늘 촉촉한 안개로 감도는 집안, 살갗을 맞비벼서 부싯돌이 불씨를 일으키듯 애정을 불붙이는 가정에 눈물겨운 아름다움이 깃들여있지 않은가. 쇠창살 높다란 담벼락 너머, 도사견 사나운 개가 보물을 지켜 주는 집보다, 블록 담장 낮은 대문 안에 연약한 죽지를 서로 의지하고, 용기를 돋워주고, 나무라고 책망하고 원망함이 없이 위로를 나누는 천장 낮은 방안에 삶의 감동은 더욱 그윽할지도 모른다.

"나도 먹을 것 좀 사들고 짐에 들어가야겠는데."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기사의 혼잣말이 듣기 좋았다. 나도 우리 집 대문을 지나서 불빛이 빠끔한 구멍가게로 발길을 돌렸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춥고 미끄러운 세상에 용케도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그 힘은 무엇일까?

-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유안진, 자유문학사)
<마음이 예뻐지는 수필>(곽재구 외 편집, 나무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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