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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소니의 합창
(이학영 외 지음/거름/321쪽/12,000원/2004년 1월 출간)


"코피티션(co-petetion)". 협력(cooperation)과 경쟁(competition)의 합성어로 협력적 경쟁관계라는 신조어다. 한때 유행한 "적과의 동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일본 소니와 삼성전자는 엄밀히 말하면 경쟁관계다. 소니는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을 수십 년째 놓치지 않고 있는 전자기기 메이커다. 삼성전자는 종합 전자업체로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동시에 디지털TV 등 각종 가전기기를 만들어 공급한다. 적어도 사업부문의 절반 가량은 소니와 겹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두 회사가 2조 원 규모의 합작회사를 세우기로 했다. 두 회사는 경쟁관계이면서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언뜻 보기에 모순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삼성전자와 소니의 TFT-LCD(액정표시장치; 컴퓨터, TV 등의 화면표시장치로 브라운관의 대체품) 분야 합작사 설립은 단순히 서로의 네임 밸류(name-value)를 이용하자는 낮은 차원의 제휴가 아니다. 두 회사 모두 세계 최고기업을 지향하는 무서운 노림수가 담겨 있다.

삼성전자의 입장에선 크게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는 "제2의 반도체"로 불리는 TFT-LCD 분야의 세계 최고기업이 되겠다는 전략의 일환이다. TFT-LCD는 미국과 유럽이 생산하지 않는 유일한 첨단제품이다.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권에만 생산공장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분야의 세계 최고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업체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다. 미국의 텍사스 인스투르먼트(TI)나 독일의 인피니온 등은 물론 후발주자인 대만 TCNC 등으로부터 추격을 받고 있다. 일본업체들도 만만한 경쟁상대는 아니다.

그러나 TFT-LCD 분야에서는 어느 분야보다도 삼성전자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TFT-LCD는 삼성전자가 기술적 우위를 갖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응용되는 분야다. 또 경쟁업체도 아시아의 몇 군데 회사에 불과하다. 반면 시장규모는 메모리 반도체에 버금갈 만큼 커지고 있다. 따라서 삼성전자로서는 명실 상부한 세계 최고기업으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이를 위해선 시장 선점이 필요하다. 삼성전자는 소니라는 최고의 전자업체를 파트너로 삼아 대만과 다른 일본업체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노림수는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TFT-LCD를 이용한 전자제품 시장도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경우 소니와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시장 초기 진입단계에서 소니와의 파트너십은 제품 신뢰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소니의 입장에서 보면 안정적으로 핵심부품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TFT-LCD는 메모리 반도체처럼 공장을 하나 짓는데 수조 원의 돈이 들어간다. 삼성전자처럼 TFT-LCD와 디지털 제품을 일괄 생산하는 것은 매우 드문 케이스다. 소니는 삼성전자와의 제휴로 TFT-LCD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다른 경쟁업체보다 우월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 TFT-LCD 시장규모가 급속하게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삼성전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이 분야 시장에 진출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래저래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진다.

두 회사의 이해가 일치된 부분은 또 있다. 바로 중국을 견제한다는 점이다. 이제 중국은 누구에게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대만업체들은 중국을 마치 자신의 나라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대만의 전자업체가 중국에 LCD나 반도체 공장을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중국의 잠재력으로 볼 때 소니도 안심하긴 어렵다. 중국이 대규모 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필립스 등 유럽의 경쟁업체들이 중국에 경쟁적으로 공장을 짓기 시작한 것도 부담이다. 따라서 두 회사가 손잡고 중국의 추격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동 전략을 수립한 셈이다.

이는 삼성전자와 소니의 합작회사가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7세대제품을 1차 생산목표로 잡았다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현재 양산단계에 있는 LCD-TV는 20인치 정도의 크기다. 삼성과 소니가 만들 제품은 40인치의 초대형 제품이다. 기술을 확실히 차별화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셈이다. 또 다른 뜻도 숨어 있다. 합작회사가 만든 제품은 소니와 삼성전자의 LCD-TV에 실려 판매된다. 두 회사의 디지털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충분한 시장 창출 능력을 갖고 있다. 기술경쟁력을 십분 활용해 시장을 계속 리드, 후발 주자들의 추격권에서 벗어나겠다는 전략이다.

물론 완제품은 각자의 브랜드를 달고 판매해야 하기 때문에 두 회사는 또 다른 경쟁을 벌여야 한다.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셈이다. 제휴관계가 확산될 것인지 아니면 이 정도 수준에서 머물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앞으로 TFT-LCD의 제휴가 디지털 TV의 표준 기술을 확보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등 제휴 범위가 확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제에 있어 국경이 없어지고, 기술발전이 시장을 선도하는 요즘에는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복합 기술이 필요한 디지털 제품의 경우 모든 부품을 한 회사가 만든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제휴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미 영국 롤스로이스 자동차에는 독일 BMW의 엔진이 장착되고 있다. 독일 벤츠에는 폴크스바겐의 엔진이 들어간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술개발을 분업화함으로써 서로의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윈-윈 전략이 보편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경제기사는 하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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