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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을 만족시켜라
1999년에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술원은 연구만 할 뿐 기업의 문제해결에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기업에 도움이 안 되는 기업 연구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예산 낭비일 뿐이다. 왜 기술원은 기업 문제 해결에 무관심했을까. 그것은 ‘고객 마인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상품을 팔 듯 기업 연구소는 사업부를 상대로 기술을 파는 곳이다. 기업에게 소비자가 고객이듯 연구소에도 사업부라는 고객이 있다. 소비자 만족도가 낮은 기업이 생존할 수 없듯 사업부와 따로 노는 연구소는 퇴출 대상일 뿐이다.

1970년대 일본에서도 연구는 전문적이고 독특한 분야라 연구원의 권한에 모든 것을 맡겨두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업부와 함께’ 일하는 연구소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치열한 경쟁 시장에서 연구개발 전략과 사업 전략, 마케팅 전략이 한 방향으로 조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1990년대로 들어서자 일본 연구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업부와 함께’에서 ‘최종 소비자와 함께’로 옮겨간 것이다. 사업부의 요구, 즉 마케팅 부문이 파악한 고객욕구 정보만으로는 ‘최종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제때에 대응할 수도 없다는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도 빠르기에 고객의 ‘변덕’에 미리미리 대처하지 않고는 스피드 경쟁에서 밀리고 만다. ‘변덕쟁이’ 고객의 출렁이는 마음속을 제대로 짚지 못하면 시작부터 다른 기업들에 뒤처진 채 들어가는 것은 의 일이 그렇게 생긴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기업의 욕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업 연구소가 결국 어떻게 되는지는 제록스의 팰러앨토 연구소(PARC)가 잘 보여준다. 1970~1980년대만 해도 PARC는 제록스가 자랑하는 첨단기술의 산실이었다. 이곳에서 PC의 개념 및 기초기술이 확립되었고 상용 마우스, 이더넷, GUI 등 온갖 혁신기술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제록스의 자랑이었던 PARC는 오히려 골칫덩이로 변해갔다. 연구소의 기술수준은 여전히 높았고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도했지만 정작 모기업인 제록스는 막대한 연구비만 쏟아 부었을 뿐 성과의 결실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PARC가 지향하는 것은 ‘기술을 위한 기술’이었지 ‘상품을 위한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연구원들 사이에 PARC의 명성이 드높아가는 데 반해 모기업의 재정은 궁핍해졌다. 모기업이 어려워지니 노벨상을 탈 만큼 기술수준이 높은 연구소라도 별수 없이 매각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높은 기술적 이상 추구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고객’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객’을 위한 기술개발이란 어떤 것일까. 미국의 화학약품 제조업체인 버크만 연구소는 이런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이 될 만한 기업이다. 버크만 연구소의 중요한 생산품 가운데 하나는 동물가죽 처리 약품이다. 가죽제품을 만들 때 약품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제품의 느낌과 감촉, 색깔이 달라지는데 그 약품이 바로 이곳에서 생산된다. 약품 처리가 가죽의 질감 자체를 완전히 바꿔 놓는 기술 수준에 이르려면 결코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어서는 안 된다. 요즘 가죽제품 트렌드가 어떤지, 소비자들은 어떤 질감과 느낌을 원하는지 등 고객의 기호를 조사해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처방을 개발해내야 한다. 이때 고객이라 함은 구두나 핸드백, 의류 등을 생산하는 가죽제품 브랜드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이 단계에서 자꾸만 ‘에러’가 났다. 영업사원이 상대편 회사 쪽 얘기를 대충 듣고 와서 어림짐작으로 만들다 보니 샘플를 가져가면 자꾸만 제동이 걸렸다. “너무 딱딱하다”고 해서 다시 만들어 가져가면 이번엔 “너무 무르다”고 되돌려 보내왔다. 제품 하나를 납품하기까지 샘플이 몇 번이나 정신없이 오가야 했고 연구원은 연구원대로 약품을 다시 개발하느라 아까운 시간과 재료를 낭비했다. 이래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나온 해결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R&D에 도가 튼 연구원을 영업일선에 내세워 첫 단계부터 고객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버크만 연구소의 세일즈 마케팅 파트는 양과 질 모두가 강화되었다. 결국 회사의 생각은 적중했다. 가죽과 약품을 모두 잘 아는 유능한 직원들이 고객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주문사항을 꼼꼼하게 챙겨 가죽 약품 전문가인 연구원들에게 제대로 전달했다. 당연히 커뮤니케이션에 혼선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고객의 요구를 정확하게 반영해 개발한 약품은 단 한 번에 고객의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시행착오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고객만족도는 크게 향상되었다. 이렇게 영업하다 보니 경쟁 회사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버크만 연구소는 가죽 약품 하나로 전세계에서 마켓 리더의 지위를 굳건히 다졌다.

PARC가 될 것인가, 버크만 연구소가 될 것인가. 그들의 엇갈린 행보를 보면 대답은 자명하고 간단하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다만 쉽지 않은 것은 ‘이 해답을 어떻게 실천하는가’이다. 오늘날 변덕스러운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 『지식을 넘어 창조로 전진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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