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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의 결단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면 그게 큰 짐이 될 것입니다. 자식들이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한 끝에 매각을 결정했습니다.” 최근 국내 밀폐용기 1위 업체인 락앤락의 창업주인 김준일(65) 회장이 한 인터뷰에서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대신 매각한 배경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김 회장은 슬하에 삼 형제를 두고 있으며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 아들이 락앤락에 재직하고 있다. 하지만 김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와 락앤락의 글로벌 기업 도약을 위해 보유 주식을 사모펀드인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에 전량 매각했다. 김 회장은 “아직 애들이 세상 경험이 많지 않아 회사 승계가 결국 그 애들에게도 큰 짐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울러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게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경영 철학도 밝혔다.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것은 성공률이 가장 낮다.”면서 “자식의 의욕과 현실은 다르며 경험적으로 판단할 때도 그것은 아니라고 봤다.”고 말했다. 이날 공교롭게도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이 뇌물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 회장이 2세 경영이 아닌 사모펀드에 주식을 전량 매각한 선택의 배경에는 27세에 락앤락을 창업한 후 39년 함께한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 사회공헌에도 앞장서 온 김 회장은 지분매각 금액 일부를 지난해 설립한 아시아발전재단에 출연한다고 밝혔다. 이 기사를 읽으며 오래전에 있었던 미래산업 정문술 회장의 일화가 생각났다.

새해 들어, 내 머릿속에는 ‘은퇴’라는 한 단어뿐이었다. 오래전부터 공언해 왔던 일이었지만 막바지에 이르러서까지 그 단어는 내 안에서 수백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미래산업>이 내게 어떤 회사였던가. 공직에서 강제 해직되고, 마흔셋의 나이에 무작정 뛰어들어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일군 ‘내 회사’가 아니던가. <미래산업>은 차라리 내 목숨이었다. 일선에서는 물러나더라도 ‘자문’이나 ‘고문’쯤 되는 명함을 찍어 수렴청정하는 모습도 그려보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가 다시 아차, 싶었다. 늙어 추해지는 게 이토록 순간이구나!

한편으로 아이들에 대한 심경도 복잡했다. ‘회사는 애비 것이 아니라 주주와 종업원들 것’이라며,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던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니 결국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어려웠던 집안 사정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일찍부터 제 몫을 스스로 감당해 왔던 기특하고 애틋한 내 새끼들. 경영권이란 아비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 그야말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모두 갖춰진 최고의 종합선물 아닌가.

신년 시무식을 하루 앞두고, 나는 점심시간에 두 아들을 음식점으로 불러냈다. “이제 물러날 생각이다. 나는 너희들이 회사를 잘 이끌 능력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래산업>은 내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물려줄 수가 없구나. 정말 미안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큰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정 잘하셨습니다.”
거의 동시에 둘째가 받았다. “아버님, 훌륭하십니다.”
아이들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저희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저희는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로 인해서 약해지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번복할 용기를 얻기 위해서 아이들을 불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된통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덥힌 청주를 거푸 석 잔이나 들이켰다. 낮술에 취해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나는 양손으로 아이들의 등을 힘차게 다독였다. “나야말로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고맙다.”

죽음의 절망 속에서 일구어낸,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미래산업〉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주고 은퇴와 함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뒤 정문술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용궁에 갔다 온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없음’의 극한을 경험해 본 사람이다. 짐을 부리고 난 뒤의 청량감이 이토록 절실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오히려 ‘없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돈을 포기하고 나니, 더 가져야겠다는 욕심과 지켜야 한다는 초조감, 가지고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해야 한다는 자괴감 등등의 온갖 번뇌까지 말끔히 사라졌다. 버림은 소유의 끝이 아니라 소유의 절정이다.”

어렵게 기업을 일구어 온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창업주들이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일군 회사인데 남의 손에 넘겨준단 말인가.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그리고 기죽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주고 싶은 것이 대다수 부모의 심정일 것이다. 물론 부모가 일군 기업의 가치와 경영철학을 이어받아 더욱 큰 가치를 이루어내는 자식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모두 갖춰진 최고의 종합선물이 가족 간의 불화를 부르고 결국은 자식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사례들을 우리는 수없이 봐 왔다. 은퇴를 앞둔 창업주들은 과연 어느 길이 진정으로 자식들의 행복을 위하는 길인지 생각하고 지혜로운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 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

『정문술의 아름다운 경영』
(정문술 지음 / 키와채 / 267쪽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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