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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그리고 엄마
2주간의 부활절 휴가에 동행이 있었다. 엄마가 한국으로 날아가버린 뒤 혼자서 두 달 넘게 자취 생활을 했던 만 열일곱 살의 작은아이다.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언니마저 6개월 전, 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 뒤 작은아이는 외로움이 많이 깊어졌다. 그 와중에 엄마마저 곁을 떠나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촉박하게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휴가 계획을 잡은 것도 실은 작은아이의 방학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면 한 달간의 기나긴 대학입학시험을 쳐야 하는 작은아이는 나와 별도로 공부와 산책으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냥 우리 따로 살자고요. 서로 뭘 하든 간섭하지 말고.” 그래서 밥도 녀석이 반, 내가 반을 하기로 했고, 잠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도 서로 간섭하지 말고, 뭘 하며 지내든 서로에게 부담 주지 말자고 협약을 맺었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노릇이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두 딸은 내가 보호하고 키워야 하는 자식이 아니라 때론 동료처럼, 친구처럼, 그리고 가장 신랄한 비판자로 내 옆에 서 있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늦추고 싶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독립’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조차 없는 작은아이에게서 걱정보다는 서운함이 앞섰던 데는 그 영향도 컸다. 자식의 독립은 늘 부모에겐 너무 빠르고, 자식에겐 느린 일이라더니 그 말이 맞다. 아직은 어린 것 같지만 이제 슬슬 독립을 꿈꾸는 작은아이와의 이번 ‘동행의 시간’ 중에는 룸메이트로서 작은아이를 조금은 떨어져 지켜보려고 한다.

한동안 말이 없어 삐친 줄 알았는데 작은아이가 운전 중인 내 손을 슬며시 잡고 나를 보며 웃는다. 녀석의 웃는 얼굴에 자존심도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에이, 이러면 안 되는데!’

산속에서 날이 저물어 간다. 작은아이가 산속 불 켜진 집 한 채를 보며 그런다. “엄마는 밤에 불 켜진 집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뭐, 저 집에 누가 살고 있겠구나, 그런 생각?” “난 집들이 꼭 책 같아.” “책? 왜?” “저 안에 정말 많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있는데 읽어보기 전까지는 모르잖아. 집들도 꼭 그런 것 같아.”

날 저문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더 한적하다. 차로 5분, 10분을 가야 뜨문뜨문 불 켜진 집들이 보인다. 그 불빛이 등대 같다. 저 불빛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어떤 등장인물이 살고 있을까. 어떤 집 이야기든 한 권의 소설은 족히 나오리라 싶다. 내 가족의 삶이 그러하듯이.

다음 날 차를 멈춘 곳은 울창한 숲 속이었다. 전화기를 타고 침울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로 이사 간 집이 봄비에 잠겼다고 한다. 손으로 잡아 쥐어짜면 초록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이 초록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전화기에서 건너온, 분당의 반지하 연립 주택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이 현실감 없이 들린다. 현실이 꿈인 듯 앞뒤가 안 맞고 어지럽다. 위로도 안 되는 ‘어떻게 하면 좋지?’만 두어 번 반복하다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한동안 차 시동도 걸지 못하고 그대로다. 깊이도 알 수 없는 맘바닥 어디쯤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울컥울컥 올라온다.

마흔이 되기 전,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부모님의 잇따른 죽음으로 지독한 맘의 몸살을 앓다 결국 하던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며 유학을 결심했다. 초등학교 6학년, 막 중학교에 접어든 두 딸을 데리고 남편도 없이 시작했던, 밑도 끝도 없이 무모했던 영국에서의 생활. 3년이면 충분하리라고 계산했던 시간이 6년으로 늘어나는 사이 내 맘은 돌림노래의 되돌이표처럼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6년간 나와 아이들 유학비를 대느라 남편은 해마다 이사를 다녔다. 다닐 때마다 집은 점점 작아지고 낮아졌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었던 남편이었다. 이래저래 참 미안한 휴가가 돼버렸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한국에 있는 큰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국에서 의대 진학을 생각했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 대학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큰아이에게도 왠지 많이 미안했다. “학교생활은 괜찮니? 적응은 잘되고 있어?” “응. 괜찮아. 엄마는 좋아요?” “좋아. 근데 너랑 아빠한테 많이 미안하다.” “미안하긴! 엄마가 늘 그랬잖아.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라고. 이왕 간 건데 즐겁게 지내고 와야죠.”

애들 키우며 수년간 내가 아이들에게 말했던 교훈을 아이들로부터 종종 되돌려 받곤 한다. 큰아이와 인터넷 전화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눈치 빠른 작은아이가 벌써 심란한 내 기분을 알아차리고 저녁은 자기 손으로 스파게티를 해보겠다고 나선다. 가족은 사랑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미안함과 고마움이 쌓여 서로에게 등을 빌려줄 수 있는 산이 되는 듯하다.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들이 커서 산이 되어주니 미안하고 참 고맙다.


-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중에서
(오경아 지음 / 샘터 / 327쪽 / 13,8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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