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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곁에 있어 다행입니다
이른 새벽, 일산신도시에 자리한 국립암센터 버스정류장에는 딱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서울로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국립암센터 입원환자의 가족들이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종종 스모그인지 안개인지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연막이 가득할 때가 있다. 짙은 안개가 눈앞을 가려, 호머 헐버트의 『안개 속의 얼굴』이라는 소설이 떠오르던 어느 날이었다. 불쑥 한 중년 여성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서울역 가는 버스 서는 데 맞습니꺼?”

양쪽 손엔 오랜 기간 동안 병원에서 지낸 듯한 흔적이 보인다. 옷가지와 이불 보따리가 잔뜩 들려 있다. 가족 병구완을 하면서 지내다가 다시 생계를 위해 집으로 향하는 것인가, 아니면 입원 중인 친지의 병문안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1200번 버스가 있는데 오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저도 그거 타거든요.”
“그래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잠시 뒤 그녀에게 버스가 온다는 손짓을 하고는 그녀를 버스에 먼저 타도록 했다. 그녀가 절뚝거리며 버스에 올라타는데 다른 승객들에 비해 2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어깨, 쓸쓸한 뒷모습, 밑창이 다 닳아버린 낡은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안고 있는 고단함이 한가득 내 시선에 들어온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다. 자리에 앉은 뒤 옆자리에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놓는데, 수건과 초록색 칫솔 같은 것들이 삐져나와 있는 게 보인다. 다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을 때, 그녀는 암센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한 5분쯤 지났을까. 버스 안 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잠이 덜 깬 승객들은 저마다 자신의 휴대전화인지 확인해 본다. 그러나 그 임자는 다름 아닌 그 여인이다. 난 그녀의 전화 통화를 우연히, 정확히 말하면 비자발적으로 엿듣게 됐다.

“당신인교? 암환자가 잠 안 자고 뭐한대요? 쪼매만 기다리소. 내 집에 후딱 댕겨 올 낍니더.”

병상에 있는 남편이, 집으로 내려가는 부인이 걱정돼 전화를 한 모양이다. 한 5분쯤 통화한 뒤 그녀는 “그래요. 당신이 곁에 있어 참 다행입니더.”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순간, ‘당신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이란 말이 내겐 ‘당신이 지금 살아 있어줘서 참 다행’이란 말로 들렸다. 그냥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엔 그런 문장으로 스며들었다.

40여 분 뒤 버스는 서울역 환승정류장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버스 내부의 차분함이 사라지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인파들의 왁자지껄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제 그녀도 버스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힘겹게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간다.

그녀는 불편한 몸으로 서울역을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버스에서 보았던, 그 묘한 미소였다. 추측하건대, 그녀의 미소는 남편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내포된 일종의 기도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버스가 출발하자 서울역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이 천천히 멀어진다. 난 그녀의 뒷모습이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봤다. 그녀는 불편한 다리로 또다시 절뚝거리며 걷고 있다.

그런데 뭐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40여 분 전에 버스정류장에서 봤을 때만큼 처량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매 순간을 감사히 여기는 것 같았고, 결코 무너져 내리지 않은 채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의 형상은 그녀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잔상처럼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애지 욕기생(愛之 慾基生)이란 말이 떠올랐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힘’이란 뜻인데 언젠가 논어를 읽다가 본 것 같다. 그렇다. 그녀는 삶의 비루함과 허무함 앞에서도 남편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간직한 채 주어진 삶을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겐 사랑이야말로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인 셈이다. 앞으로도 그녀는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투병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매일매일 사랑을 고백하고,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 또한 확인할 것이다. 진심을 다해 “당신이 곁에 있어 참 다행입니다.”라고 속삭이며…….

-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 중에서
(이기주 지음 / 청조사 / 152쪽 / 11,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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