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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가려움
히말라야 고원의 라다크 사람들이 말하는 ‘호랑이의 무늬는 밖에 있고 사람의 무늬는 안에 있다’는 의미가 요즘 새롭게 다가옵니다. 살다 보면 부부에게 외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귀중한 건 내면에 자리한 성품이지요. 팔천생의 인연으로 이승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고 합니다. 이 소중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함께 살다 보면 관성에 젖어 덤덤해져요. 평소에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남편을 보면서 저도 사랑보다는 정으로 사는 게 부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두드러기가 남편 마음을 알게 해 주었지요.

두드러기는 소문도 없이 찾아와 온몸에 소나기처럼 퍼부었어요. 조금씩 돋아나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전신에 붉은 꽃으로 피어나더군요. 손이 닿는 곳마다 부풀어 오르면서 찬란한 꽃봉오리를 구석구석 새겨 넣었어요.
‘아, 이러다가 정신을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다리가 아픈 고통은 충분히 참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니, 피 흘리며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울까요. 두 아이를 낳던 그때의 아픔을 되돌아보아도 그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려움이 주는 그 무시무시함을 겪어 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존재의 가려움으로 내 육신은 지쳐 갔고, 조용하던 몸 안은 세포들의 술렁임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르며 울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영혼은 정전되었고 대책 없는 슬픔에 엉엉 울었지요.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남편은 눈이 등잔만 해져서 병원에 가 보자고 했어요. 한밤중에 응급실에 가 본들 뾰족한 수가 없을 듯싶어 그때부터 별짓을 다 했습니다.

온몸을 얼음으로 마사지했지요. 잠시 서늘하고 얼얼한 느낌이 들어 가려움에서 해방되려나 기대했어요. 하지만 어림없었지요. 이번에는 붕긋붕긋 일어난 곳에 사정없이 물파스를 발라 보았습니다. 따갑고 아파서 머리끝이 섬뜩해졌습니다. 딸이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알로에가 좋다고 하더군요. 아침 일찍 남편이 한달음에 달려가 사 왔습니다. 남편과 딸이 알로에즙을 전신에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가 떠오르더군요.

‘살아생전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나는 두드러기 때문에 죽기 전에 호사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와중에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알로에도 화끈거리기만 할 뿐 그 무지막지한 가려움증은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밤은 깊어갔지만 남편은 문중의 어른들께 전화를 걸어 좋다는 민간요법을 모조리 적더군요. 그중 탱자나무 열매가 명약이라는 말을 듣고 남편은 한밤중에 집을 나섰습니다.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라는 시를 기억하시는지요. 열병을 앓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눈 속을 헤치고 산수유 열매를 따오지요. 병을 고친 아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눈 속에 따 온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

그 서른 살 아들이 생각나는 밤이었지요. 남편은 이곳저곳을 헤매다 어느 집 울타리에 열린 탱자를 서리해 왔습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당신 덕에 어릴 때도 못해 본 서리를 다 해 보았다’며 멋쩍게 웃는 남편이 고마워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탱자를 달인 물을 온몸에 발라 주는데 가슴이 아릿해지더군요.

양귀비인들 사랑하는 사람이 해 주는 이런 호사를 누려 보았을까요. 흉한 몸을 쓰다듬으며 안쓰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남편과 자식의 사랑이 봉숭아 꽃물보다 더 진하게 가슴으로 젖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침이 다가왔고 거울 앞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지요. 붉디붉은 꽃을 온몸에 단 나신의 여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서 있더군요. ‘언제 내 팔자에 요런 멋진 꽃을 전신에 새겨 보나?’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 달 가까이 두드러기와 친구 되어 지내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행복했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눌 남편이 있다는 게 눈물겨웠지요. 남편은 가슴 깊이 간직했던 사랑의 무늬를 내 몸에 조건 없이 새겨 주었습니다.

약해진 면역력이 온갖 병원체를 받아들여 내 몸을 망가뜨려도 이제는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견고하게 쌓은 사랑이라는 면역항체가 나를 지켜 준다는 걸 믿기에 더는 존재의 가려움이 두렵지 않습니다.

- 『스며들다』 중에서
(구장서 외 지음 / 계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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