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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재 이야기
정발산이 가까이 바라보이는 일산 신도시 주택가에 둥지를 튼 것은 1999년 말, 20세기 끝자락이었다. 건축가인 남편이 손수 설계하여 여섯 달에 걸쳐서 지은 3층집에, 세 호주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딴 ‘東仁齋’ 현판을 걸었다. 아파트 문화에 젖어 있던 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종일 금빛 햇살이 드는 동인재에 친정 세 남매가 보금자리를 폈다. 모두들 마음의 빗장을 풀고 새천년의 밝은 해와 함께 새로운 삶을 맞이했다.

두 남동생은 2층과 3층에 자리를 잡고, 우리 부부는 연장자라는 특혜로 1층에 짐을 풀었다. 예전처럼 대가족이 함께 사는 것 같지만, 각 층마다 독립되어 있어 서로 사생활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동인재의 어느 층, 어느 방에서나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나무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지하층에는 공동서재와 가족 모임을 위한 음악실을 마련했다.

서재에는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손때 묻은 장서를 중심으로 세 남매들이 품고 있던 책들을 한데 모아 공동 서재로 꾸몄다. 서재는 만남과 대화와 묵상의 공간이다. 서재에 들어서면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현대와 고전을 넘나들며 젊은 날 내 영혼을 적시던 다양한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조카들은 서재에서 동아리 학습과 독서 모임을 갖는다.

남편이 집을 설계할 때마다 노자 사상의 ‘빈 공간의 쓸모 있음’을 강조해 왔듯이, 방을 넓히는 데 쓰이지 못한 공간이 실내 정원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을 건물 속에 담고 싶은 마음이 중정(中庭)을 만든 것이다. 실내 정원은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집 안에 앉아서도 우주와 호흡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열린 공간에서 살아가면 자연히 마음도 열리게 되나 보다. 사십 대, 오십 대, 육십 대의 세 가정이 한 울타리 안에 살지만, 얼굴 붉히는 일 없이 화목하고 활기차게 지내고 있다. 시누이와 올케가 한 지붕 아래 산다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릴 게다. 하지만 신의 사랑에 버금가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여인들과, 흙처럼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남정네들 덕분에 한결같이 화평을 누릴 수 있으리라. 우리 둥지에서도 가정마다 가슴 쓸어내릴 크고 작은 일들이 어찌 일어나지 않겠는가. 슬프고 황망한 일을 당할 때마다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기에, 부모님 슬하에서처럼 여전히 푸근함을 누리고 있다.

3층에 사는 둘째 동생의 쌍둥이 손자들이 빚어내는 소리는 생명의 함성이며, 시들어 가는 우리의 세포에 생기를 불어넣는 비타민이다. 장모님을 모시고 사대가 함께 사는 동생은 워낙 호인이라서 객식구들이 끊이지 않아 언제나 잔칫집 분위기다.

2층의 막내 동생네 작은딸은 열여덟 살이 되어서도 혼자서는 먹지도 걷지도 못하는 아이다. 그 애가 태어났을 때 의사는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밤낮으로 울어 대는 어린 것을 안고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동생 내외를 보면서 나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았다. 그러던 아이가 지금은 명랑한 곡에 맞추어 고개를 까닥거리며 흥겨워하다가도 슬픈 곡이 나오면 입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가 되었다. 그 아이는 온종일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며 종알종알 이야기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오직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식구들 귀에만 들리는 보석 같은 이야기다. 그 아이는 행복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궁극적인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날개 없는 천사다. 가족들이 그 아이를 사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은 가슴 적시는 긴 시(詩)다.

아들들이 직장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귀여운 손녀를 자주 볼 수 없지만, 우리 부부는 함께 사는 동생 식구들 덕분에 적적함을 느낄 새가 없다. 한두 자녀만 기르는 가정에서는 체득하기 어려운, 사촌 형제들끼리 어울리면서 저절로 배우는 양보와 배려에 조카들이 대견하고 고맙기만 하다. 명절이나 가족들의 생일에 스무여 명이 지하층 음악실에 모여 장기자랑을 할 때, 아이들의 숨은 재능이 발견되기도 한다. 성량이 풍부한 셋째 조카딸은 음대를 가기 위해 발성법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가을 큰 조카딸의 함이 들어오던 날, 짓궂은 함진아비들을 맞이하기 위해 남편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그날은 떡을 좀 넉넉히 해서 이웃에 모두 돌렸다. 그리고 올 새해 아침에는 늘 하던 대로 세배를 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스무여 명이 차례대로 나누는 덕담의 내용도 한층 성숙해지고 있음을 느끼노라니 세월의 흐름이 고맙게 여겨진다. 동인재는 삼 남매 가족 사대가 이웃들과 어울려 정겹게 살아가는 소우주다. 사철 내내 집 안팎에서 꽃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강아지와 함께 놀 수 있는 꽃동산이다. 훈김이 도는 둥지 안에서 자잘한 일상사를 통해 사랑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정과 추억을 쌓아 가며 자유와 휴식을 누리는 낙원이다.

- 『꽃은 흔들리며 사랑한다』 중에서
(허숭실 지음 / 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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