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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의 딸 호원숙
1986년 늦가을, 아버지는 폐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꼭 낫게 하고야 말겠다고 투쟁하는 사람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의사인 자식들 말만 듣지 않고 여러 가지 약방문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버지의 태도는 한결같이 의사인 자식의 말에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 감동적으로 투병을 하셨다. 서울대학병원 안에서도 모범적인 암환자로 소문이 났다. 병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떤 종교인 못지않다고 모두들 존경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모본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1987년 2월, 아버지는 막내 원태의 대학 졸업식에 겨우 나오셨다. 어머니는 “우리가 너희들 대학 등록금을 몇 번이나 냈는지 아니?” 하고 물으셨다. 1남 4녀, 그중 6년제 의과대학을 둘이나 다녔으니 오십 번이 넘었다. 자랑스러운 우리 아버지. 등록금을 낼 의무에서 겨우 벗어나자 병은 깊어지고……. 어머니와 나는 졸업식장 한구석에서 눈물을 훔쳤다.

1988년 4월,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입원했다가 집에서 기다리라는 통보를 받아 퇴원했고, 결국 그해 5월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실까 봐 잠을 못 이루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레지던트였던 원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정성껏 간호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석 달쯤 원태와 둘이서만 생활하던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잃어 갔다. 어머니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생기를 잃은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너무 큰 자리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백일제를 마치고 넷째가 살고 있는 미국을 다녀오셨다. 손녀의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 아침이었다. 부산 우리 집으로 셋째 원경이 남편이 전화를 했다. “형님 좀 바꿔 주세요.” 그 목소리의 무거움이 분명 큰일이 생긴 것 같은데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남편을 찾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냥 명랑하게 전화를 받던 남편은 갑자기 얼굴이 흐려지더니 전화기 줄을 붙들고 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오, 하느님.’ 하고 쓰러졌다. 이제 와서 구원을 청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원태의 갑작스런 죽음.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원태도 원태지만 어머니가 걱정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었다. 도대체 엄마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급히 김해공항으로 나가 비행기를 타고 어머니가 계신 둘째네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펄펄 뛰며 하느님을 원망했다. 절에 들어가겠다고도 했다. 이런 과정들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태가 살아 있을 때도 우리에게 기쁨과 사랑과 자랑스러움을 주었으므로 죽어서도 결코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리라는 한 가지 믿음만 붙잡았다.

우리는 아버지의 묘 아래에다 원태를 묻었다. 불효자식이라고 못된 놈이라고 욕을 하는 친척도 있었지만 죽음은 그 애의 의지가 아니지 않은가. 그 애를 묻고 온 날 어머니는 우리들을 부르셨다. 종이에 쓴 글을 내놓으며 너희들이 좋은 것을 골라 원태의 묘비명을 하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우리가 원태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그 애의 묘비명을 쓰신 것이다.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
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

1989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원태가 살아 있을 때 사 놓고는 어머니한테 사용하시기를 권했던 워드프로세서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로서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을 책임지고 마무리 지어 주어야겠다는 의무감에서였다. 남은 우리들은 어머니가 『미망』을 따뜻한 결말로 완성한 것을 기뻐하고 감사했다.

다행히 남은 자식들이 창의 불빛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지척에서, 수프가 식지 않을 만한 이웃에서, 이 나라 끝에서 혹은 지구의 반대 방향에서 돌봐 주고 걱정해 주어 살아가는 데 힘이 돼 주고 있다. 나는 자식들과의 이런 멀고 가까운 거리를 좋아하고, 가장 멀리 우주 밖으로 사라진 자식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도 있는 신비 또한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남겨진 자유가 소중하며 그 안에는 자식들도 들이고 싶지 않다.

어떤 상황과 고통도 어머니의 숨쉬기를 끊어 내지 못했다. 도리어 호흡과도 같았던 글쓰기가 어머니의 운명과 고통을 이겨 내게 만들었고, 고독한 작업 중에 빛나는 자유의 기쁨은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으리라.

-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중에서
(박완서·호원숙 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360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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