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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이삿짐을 싸는 데 익숙해진 그녀는
내가 없어도
쉽게 떠날 준비를 끝낸다
내 몫으로 남겨진 가구나 이불들은
너무 낡거나 무거워서
버리고 가도 괜찮은 것들이다
필요하다면 가볍게
그녀는 기르던 개도 이웃에 준다
함께 산 지난 오 년 동안 기른 머리를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싹둑 자른 그녀는
요즘 취한 내 옆에서 자지 않고
슬그머니 부엌으로 빠져나와
주소를 쓰지 않은 편지를 쓴다
송곳니가 빠진 무표정한 얼굴로
오래 살펴보면서
냉장고와 함께 밤을 새는 그녀는
낯설게 아름답다

이제는 태어나서 만난 사람 중에 아내가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지낸 사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부라고 해도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고 살펴볼 수 없는 그늘이 있는 것이다. 가끔 아내가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내가 사고를 치려 하거나 일상에서 일탈을 하려 할 때 아내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없이 나를 들여다본다.

아내는 내게 멀리 있는 큰 산이다. 도무지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못한 그 산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므로 큰일 앞에서는 아무래도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난 뼛속까지 들여다보이지만 아내는 아직 숨겨진 봉우리가 많기 때문이다. 뭐, 그렇단 말이다. 불만은 없다. 이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어느 한쪽이 어른스러워야 하지 않겠는가. 난 그저 아내의 깊숙한 곳으로 갱도를 파고 들어가 그 안에서 잠들고 싶다.

앞의 시는 내 첫 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아직 신혼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목의 글을 썼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시인은 나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심경까지도 헤아리는 글을 쓴다. 즉, 시적인 현실은 실제의 나의 현실과 닮을 이유가 없다. 아내 역시 그런 줄 알기 때문에 이 제목을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날은 정말로 아내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모든 의심은 한 사람의 독단적인 추측에 의해 일어나는 법이다. 그렇게 보면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그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처럼 보인다. 아마 그런 생각의 바닥에는 왜 아내는 나랑 살면서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의처증 때문에 폭력적으로 변하는 남편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들은 아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리라. 자신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희생을 아내가 감수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럴 때 아내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이다. 감히 내가 소유하거나 만질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이럴 땐 얼른 꼬리를 내리고 항복해야 한다. 먼저 다가가 곰살맞게 굴어야 한다. 부부는 지는 게 이기는 거니까.

- 『나에겐 아내가 있다』 중에서
(전윤호 지음 / 세종서적 / 200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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