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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자아성찰만이 진정한 용서를 낳는다
(황석영 지음/창작과비평사/262쪽/8,500원)

소설가 황석영이 쓴 『손님』은, 작가가 방북 당시 신천의 미군 양민학살을 고발하는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에 안내되었을 때 혹시 ‘또 다른 진상’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던 중, 나중에 뉴욕에 체류하면서 한 목사를 만나 그의 소년시절의 목격담을 듣고서야 의문이 풀리면서 많은 자료와 목격담을 모아 수감생활 후 써내려간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우리나라가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을 즈음 외국에서 들어온 기독교와 맑스주의로 인해 많은 혼란이 초래되었고, 그 와중에서 신천의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있다. 천연두를 막아내고자 했던 조선 민중들이 이를 서양에서 들어온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그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하고,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 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자신의 본뜻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35,000 명이나 되는 신천 양민들이 학살된 것이 누구의 책임이냐는 것이다. 과거에서 뭔가를 배우지 않고는 우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이들을 죽였는가? 과연 기독교와 맑스주의가 이들을 죽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른 제3세계 국가에서 보듯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갈등은 어떠한 형태로든 폭발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다만 기독교와 맑스주의라는 툴을 통해 표현되었을 뿐 이들이 없었더라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무정부 상태와 전쟁으로 인한 혼돈 상태에서는 빈부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신천대학살의 경우 평범한 주민들 스스로가 서로를 공격했고 이러한 폭력은 더욱 가속화되고 증폭되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극도의 만행을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폭력에 대한 책임이 ‘선량한 주민들’이라고 하는 바로 신천 양민 자신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작가는 신천양민학살의 책임을 거짓으로 미군에게 전가하는 북한당국과 마찬가지로 그 책임을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와 맑스주의에 전가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천양민학살은 다른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우리들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독교 청년단원이던 류요한이 동료의 애인 집을 찾아가 쑥대밭으로 만든 것을 비롯하여 맑스주의자들이 지주의 재산몰수를 위해 저지른 극악무도한 짓들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한 번 선택한 악은 바이러스처럼 활력을 갖는다. 잘못 저지른 성관계 한 번으로 에이즈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오게 되면 처음에는 감기 정도로 가볍게 여겨지지만 결국 흉측한 모습으로 죽게 되는 것과 같다. 일단 우리가 악을 선택하게 되면, 그것은 가속화되고 증폭되어 결국 인간을 괴물로 만들고, 끝내는 죽고 죽이는 사망에 까지 이르게 된다.

1961년 독일의 뉘렌베르크에서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전범 중에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나치 독일의 수뇌부 중의 한 명이 있었는데,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얼마나 많은 유태인을 학살했는가를 증언하기 위해 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유태인이 법정에 나왔다. “증인,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학살을 명령했던 장본인 맞습니까?” 가까이 가서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던 그는 그만 기절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깨어났는데, 왜 기절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전 세계에 퍼졌다.

“나는 저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우슈비츠에선 너무나 달랐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었죠. 광기가 빠지고 나니까 그저 평온한 사람이군요.”

인간의 심층심리학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이러한 충동과 악을 우리 자신과 분리하여 생각한다. 우리 내면의 심리 역동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내면에서 광기를 일으키는 실체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선을 선택하든 악을 선택하든 그것은 우리 내면에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며 그것이 모여 신념이 된다. 그리고 그 신념에서 우리의 행동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한 행동은 우리 신념의 결과물로서 그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등장인물 중 ‘삼촌’이라는 인물은 기도와 신앙을 통한 자기 성찰로 다른 인물들과는 다소 구별되는 신중한 행동을 보이는데, 이 또한 그가 선택한 것의 결과이다.

작가는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사건을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 등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죄에 대해 서로를 용서하고 이제 화해의 새 세기를 향해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나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통감하지 않고 서둘러 상처를 봉합하는 식으로 용서하는 것은 값싼 용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통해서는 우리는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또 다시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고 다시 용서해야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경향들이 나타난다. 과거 서슬 퍼런 군부독재시절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공안검사나 정치인, 언론들이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의 무고함을 강변했고 우리는 화해의 차원에서 서둘러 덮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나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다시 권력의 상층부에 올라 새로운 과오들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란 값싼 동정이 아니다. 죄를 자복하고 깊이 회개하는 마음이 선행될 때 비로소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있고, 그 용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가 회복되어 화해와 상생의 희망찬 새 세기를 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재판관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내가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주기도문의 문구처럼, 우리 모두는 죄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순간 순간 자기 성찰을 통한 깊은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깊은 자아성찰만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진정한 용서를 낳기 때문이다.

- 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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