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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이념’보다도 강한 끌림이다
(박완서 지음/현대문학/310쪽/9,000원)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써내려간 작가 박완서 씨의 자전적 소설이다. 이사간 후배의 집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찾아가본 처녀시절 살던 돈암동 안감내, 거기 그대로 남아 있는 ‘그 남자네 집’. 그 집 앞에서 주인공 ‘나’는 ‘구슬 같은 처녀’였던 자신의 20대를 회상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그러나 암울하고 극빈했던 그 공간과 시간을 빛나게 해주었던 애틋한 청춘의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지난 과거를 하나하나 꺼내어 반추하게 한다.

‘나’는 6·25전쟁 후 어려운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서울대를 중퇴하고 미군부대에 일하러 다니던 시절, 퇴근길 전차 안에서 우연히 그 남자와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해 레코드를 수집하는 섬세한 남자. 그러나 만남이 익어가면서 ‘나’는 막내 특유의 연약함을 보이는 그 남자에게 갈등을 느낀다. 홍예문이 높은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몰락해 폐가처럼 되어 버린 그 남자네 집, ‘나’는 그 집을 드나들게 되면서 결심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새끼를 위해 그런 둥지는 버릴 수밖에 없어.” 결국 그녀는 첫 사랑에게 이별을 고하고 비록 상고 출신이었지만 ‘웬만한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은행원과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은 환상이었고, 그 환상은 곧 깨졌다. 매사가 세밀한 남편과 수랏간 나인 집안이었다는 시어머니는 음식에서부터 시작해 사사건건 취향이 달랐고,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박수무당과 의논해 치성을 드리는 시어머니의 뒷시중을 들어야 했던 ‘나’는 시댁의 가풍에 냉소적이었다.

결혼생활은 신혼의 재미가 뭔지도 모르는 채 급격히 권태로워졌고, 그 즈음 우연히 그 남자의 소식을 듣게 된 ‘나’는 급기야 첫사랑과의 재회에 이르게 된다. 밀회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위기의 순간은 다가왔고, 어느 날 그는 하룻밤의 밀월여행을 제안하는데, 짜릿한 기쁨을 느끼며 그날을 기다리던 ‘나’는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은 그로 인해 “어딘가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이 세상에 내팽개쳐진 기분”에 빠진다.

남편의 아이를 낳고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남자가 그날 급작스럽게 뇌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재회한다. 눈앞에 나타난 그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은 채였다. ‘나’는 아직도 자신을 그리고 있는 그에게 육친애적 분노를 느끼며 첫사랑을 지운다. 그리고 그 남자를 끝으로 다시 만난 건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서였다. 그는 결혼하여 아이를 하나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점점 더 굵은 눈물을 흘리는 그 남자를 ‘나’는 무너지듯 포옹하며 담담하고 완전한 결별을 이루게 된다.

이 소설에는 전후의 피폐상황과 특히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헤쳐나가야 했던 각박한 삶의 모습들이 화가 박수근의 그림에서 보여지듯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작가도 이 작품을 연애소설의 형식을 빌은 사회소설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설의 분류를 뒤로하고, 필자가 이 글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눈여겨 본 것은 ‘취향’이라는 단어였다. 노인성 문학은 자칫하면 목적의식(이데올로기) 쪽으로 기울기 쉽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박완서 씨의 이 소설은 그 한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흔을 넘게 살아오면서 자신이 했던 모든 선택들에 대해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사용해 말하기보다는 얼핏 ‘취향’이라는 말을 내비치고 있다. 필자가 이 작품을 읽기 직전 우연히 접한 알랭 드 보통의 <왜 너를 사랑하는가>의 한 단락에도 ‘취향’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운명적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이유는 우리의 취향이 서로에게 딱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둘 다 클라리넷을 분 적이 있다든지, 우리의 책꽂이에 똑같은 버전의 안나카레리나가 있다는 사소한 사실들이 우리가 서로에게 운명지어 졌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사인처럼 느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모든 상황의 우연적 성격을 보지 못하고 사소한 일들을 목적이 있는 사건으로 변질시키는 연금술을 부렸고, 우리 삶에 억지스러울 정도의 인과관계를 부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신비주의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죄를 지었다.” - 알랭 드 보통의 「왜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

작가 박완서가 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취향’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천성적으로 대립의 각을 세우길 싫어하는 주인공의 남편이 6.25 전후의 이념 대립을 각자의 ‘취향’일 뿐이라고 말했을 때이다. 주인공은 이 말에 발칵 화를 내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오빠를 죽게 한 그 숭고한 ‘이념’이라는 것을 취향이라는 말로 격하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황석영의 <손님>에서처럼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죽고 죽이는 지경에 이를진대 ‘취향’이라는 말은 얼마나 중립적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나가는 동안 ‘취향’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이념’에는 적어도 ‘도덕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취향’은 도덕성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혹 밀회가 발각나 문책을 당했을 때 자기는 특별한 경우라고, 그건 불가항력이었다고 할 변명을 먼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결혼한 몸이고 남편과 넘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딴 남자의 몸을 고파한다면 나는 음탕한 여자가 된다. 그럼 내가 시방 고픈 건 마음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마음보다 더 깊고 더 높은 곳에서 해방을 꿈꾸는 것의 실체를 육체라고도 영혼이라고도 규정지을 수가 없다. 나는 인간이다. 남보다 도덕적이지도 동물적이지도 않는 평균치의 인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영육이 있을 것이다. 지금 시달리고 있는 것은 영혼인가 육체인가. 성적 갈망과 영혼의 고픔은 어떻게 다른가. 왜 영혼의 고픔은 추앙받고 성 욕망은 매도당하는가.”

그러나 애써 회피하려 해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건네는 말들 앞에 주인공은 끝내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취향’은 작은 동기이지만 그 취향으로 개개인이 선택한 모든 것이 모여 ‘문화’를 이룬다. 작게는 결혼문화, 가풍 같은 것에서 시작해 성문화, 사회문화, 종교문화에 이르기까지. 요즘 같이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화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칫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성숙’이라는 절대 가치를 상실한 허울 문화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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