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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나쁜 사람
지난 해 말 KBS 1 TV 팀들과 새해에 소개할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담당 PD가 장정일의 <삼국지>를 소개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 때 필자는 이문열, 황석영 씨가 쓴 작품들을 비롯해 이미 여러 종류의 삼국지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굳이 삼국지를 다룰 필요가 있겠냐며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다른 자문 위원들도 장정일이 노후 대비 차원에서 쓴 것 아니냐며 반대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장정일의 삼국지가 1월 둘째 주 테마북으로 결정되었다. 필자는 여전히 못마땅한 마음으로 그 날 장정일 씨가 TV에 나와 자신이 삼국지를 쓰게 된 배경과 동기 그리고 작품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등장인물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기술했던 기존의 삼국지와는 달리 한 인물에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는 시각에서 접근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기존에 포악스럽고 탐욕스러운 인물의 대표격으로 그려졌던 동탁에게도 분명 본 받을 만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때만 해도 필자는 장정일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으며 그저 그럴듯한 포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1년여 넘게 작업해오던 <섀클턴 평전>의 번역을 마쳤을 때 문득 장정일의 말이 떠올랐다. 필자는 우연치 않게 지난 4년 동안 극지방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을 다룬 책을 3권이나 번역하게 되었다. 1914년 12월 섀클턴은 인류 최초의 남극대륙 횡단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장도에 올랐다. 하지만 남극대륙에 도달하기도 전에 탐험선 인듀어런스호가 부빙군에 갇혀 침몰하고 만다. 그러자 섀클턴은 남극대륙 횡단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버리고 28명 전 대원을 무사귀환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수많은 위기와 역경을 극복한 끝에 마침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귀환을 이루어냈다.

2000년에 번역한 첫 번째 책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은 주로 수많은 위기와 고난을 극복한 섀클턴의 탁월한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고 난 후 섀클턴은 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때마침 창업 이후 어려운 단계를 통과하고 있던 나에게 존경하는 리더, 역경의 리더십의 화신으로서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되었다. 두 번째 책 <어니스트 섀클턴 자서전, SOUTH>은 섀클턴이 자신의 남극 대륙 탐험 일정을 보다 상세하게 기술한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후 나는 섀클턴의 인품과 탁월한 리더십에 한층 매료되었고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세 번째 책인 <섀클턴 평전>은 전기작가인 롤랜드 헌트포드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새클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기술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두 권의 책이 주로 섀클턴의 탁월한 리더십과 그가 이루어 낸 성과 그리고 위기 극복 과정에 초점을 맞춘 반면 세 번째 책은 새클턴의 탁월한 면 뿐만 아니라 비열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지극히 인간적인 약점들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안위를 희생하며 대원들을 돌보고, 아무리 커다란 고난에 직면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낙천적 태도를 견지하는 등 완벽한 리더십을 갖춘 영웅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책에 묘사된 그의 모습은 결코 탁월한 리더도, 영웅도 아니었다.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일확천금을 꿈꾸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뒷바라지해주었던 아내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였으며,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한 뒤 대금을 결제하지 않고 탐험을 떠나버리기도 하고, 아내로 하여금 옛 연인에게 돈을 빌리도록 등을 떠밀기도 했다. 그는 또한 남의 계획을 몰래 가로채기도 하였으며, 친구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한편으로는 영웅적인 리더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 사람 수준에도 못 미치는 지극히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세 번째 책을 번역하고 난 후 새클턴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변했다. 물론 그의 탁월한 위기극복 리더십은 아직도 존경하고 본받고 싶지만 보통의 삶에 있어서는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많은 단점과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다. 내가 그 동안 전폭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와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섀클턴 역시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결국 모든 인간은 결코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장정일의 말처럼 완벽하게 좋은 사람도, 그리고 철저하게 나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다만 우리 모두 때로는 좋은 면을, 그리고 때로는 나쁜 면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잊고 산다. 그리하여 사람의 한 단면만을 보고 그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떠받들다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면이 드러나면 배신감마저 느끼고 완전히 등을 돌리기도 한다. 세상의 여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최근 GE의 잭 웰치나 HP의 칼리 피오리나의 명암을 보면 이러한 풍조는 더욱 분명한 것 같다. 어차피 어떤 사람에 대해 완전히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했다가는 실망하거나 낭패 보기 쉽상이다. 차라리 우리 모두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한다면 어떤 사람에 대해 분에 넘치는 기대를 하지도 않게 될 것이고 도저히 상종 못할 사람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섀클턴에 관한 책들을 번역하면서 내가 느꼈던 것처럼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100% 완전한 정보나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100% 진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항상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를 섣불리 판단해 욕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가급적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격려해주며, 신뢰해왔던 사람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도 배신감을 느끼고 등을 돌리기보다는 나 역시 그럴 수도 있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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