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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진료소의 하루
(도쿠나가 스스무 지음/샘터사/263쪽/9,000원)

이곳에서 진료소의 문을 연 지 3년 반이 지났다. 명색이 진료소인지라 감기 환자에서부터 치매 환자, 우울증 환자, 암 환자, 죽음이 임박한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가 찾아온다. 아니, 찾아와 주신다. 환자는 하나의 씨앗이다. 어떤 싹이 터서 어떤 줄기를 뻗어 어떤 꽃을 피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곁에서 지켜볼 뿐이다. 때로는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차양을 준비하고,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놓기도 하고, 비료와 물을 뿌려주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아주 사소한 일, 나는 씨앗 하나가 펼쳐 보이는 파노라마에 눈길이 사로잡힌다. 씨앗은 늘 놀라움을 동반한다.

23년 전 나는 시내의 종합병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일반내과의로 일했고 2001년 12월, 그곳을 떠나 내 손으로 진료소를 열었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에게 왜 병원을 그만 두는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 나이 벌써 쉰세 살, 온몸 여기저기가 고장나는 나이다. 그런데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저 때가 왔다는 느낌이었다. 현대의 교육과 행정, 의료 정책에 불만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불만이 있으면 스스로 불만을 해결하라."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고 나 역시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 참. 개업한 진료소 이름이 뭐냐하면 바로 '들꽃 진료소'이다.

나는 전부터 왕진을 좋아했다. 하지만 병원에 있을 때는 왕진 갈 기회가 없어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왕진을 좋아할까? 아마도 의사로서의 위엄을 부리지 않아도 되고, 생활의 장, 삶이라는 둥지에서 숨쉬며 사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진찰실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 병 때문에 의논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암이에요. 한 사흘 전부터 식사도 못할 정도로 악화돼서 그러는데, 링거 주사 맞을 수 있을까요?"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링거 주사액을 왕진 가방에 넣고 곧바로 출발했다. 소박한 집, 문을 여닫기도 어려웠다. 집안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여자가 누워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빛은 납빛이고 호흡도 거칠고 맥은 약하고 피부는 현저한 탈수 상태였다. 너저분한 방에는 꽃 한 송이는 물론 침대도 없고 추억어린 사진 한 장조차 없었다.

"선생님, 암이 여기저기로 전이됐어요. 간에 전이됐을 때는 수술을 받았는데, 폐에 전이됐을 때는 수술을 거부하고 그 다음부터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죽고 싶은데…. 사람 목숨이 그리 쉬 끊어지지는 않는가 봅니다." 옆에 있던 딸이 눈물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딸은 시집을 갔고, 아들은 밤 10시나 되어야 일터에서 돌아와요. 빨래도 할 수 없고 부엌에서 뭘 만들 수도 없고…." 힘들게 말하다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화장실에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과연 이 집에 그냥 있게 하는 것이 좋을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나는 그녀를 어깨에 부축해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내 차에 오르게 했다.

그녀의 딸과 맏아들에게 혈액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그렇게 많이 퍼졌습니까?" 놀라는 두 사람. "그래도 많이 편해졌어요, 선생님." 환자는 웃는 얼굴이었다. 딸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날 밤 10시가 약간 넘자 맏아들이 일을 끝내고 다시 병실로 와서 어머니의 등과 저린 손발을 주물러 주었다. 가족 셋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광경이었다. 병실이 밝아졌다.

유리컵에는 꽃이 꽂혀 있고, 그녀도 분홍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참 고우시다 싶었는데, 딸이 화장을 엷게 해드린 모양이었다. 원래는 미인이셨구나! 침침한 방에서 고통에 일그러져 참담했던 얼굴이 어떻게 저리 금방 고운 얼굴로 피어날 수 있을까. 그녀는 그 어두운 방에서 외로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 소리 없이 죽으려는 각오를. 그러나 이곳에 들어와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면서, 혼자서 죽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타인의 개입을 용납한 것이리라. "이곳에 오니까 마음도 편하고, 애들도 잘해 주니까 참 좋네요. 옛날 얘기하면서 많이 웃어요. 가족끼리 여행했던 일이며 애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때 일. 집에서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늦은 밤이다. 옆 병실인 시노 할머니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문을 열어보니, 시노 할머니는 월간 문학잡지를 손에 쥐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에든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시노 할머니는 집은 부자였지만 너무 고령이라 가족들이 보살피기에는 짐이 무거워 우리 진료소에 머물고 있다. 전에 급성 심부전으로 구급차에 실려 내가 일했던 종합병원으로 실려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주치의였다.

"선생님, 저 말이죠. 의사 선생님들은 대부분, 무슨 소리를 해도 괜찮다, 괜찮다고만 하지요? 그런데 니시타니 선생님은 말이죠..." 니시타니 선생은 시내에 병원을 차려 놓고 열심히 환자를 돌보는 기독교인이다. "보통 때는 온화해요. 괜찮다, 걱정할 거 없다 그렇게 말하지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표정이 딱딱해지면서 괜찮다는 말을 절대 안 해요. 그 표정이 얼마나 멋있는지. 나, 그 선생님 얼굴이 좋아요."

"선생님, 저 말이죠. 나 그때 구급차에 실려갔을 때 말이에요. 죽는 줄 알고 선생님에게 괜찮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잖아요. 처음이었어요.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의사는…. 대단한 의사다 싶었지요. 이 선생님은 진짜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었나 싶었다. 아무튼 시노 할머니에게 한 번 붙들리면 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헤어날 수가 없다. 말은 잘 하지만 난청이 심해서 거의 듣지는 못한다.

오늘도 시노 할머니를 끝으로 하루의 막이 내린다. 들꽃 진료소의 하루하루는 이렇게 지나간다.

-『들꽃 진료소의 하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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