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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의 만남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동안 한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노인들을 위한 간호 시설이 잘 갖추어진 양로원으로, 일을 시작하기 2주 전 노인들과 대화하는 방법에 대해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나는 수줍음이 많은 소녀였다. 부모님은 내가 수줍음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 일을 권해 주셨다.

그러나 그 일은 예상보다 많이 힘들었다. 각종 암기 사항들과 습득해야 할 대화 기술과 방법이 상당히 많았으며 그 각각의 교육에 대해 나중에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2주 동안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았지만, 막상 노인들과의 첫 만남에서 나는 너무 긴장이 되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처음 만난 노인은 1년여를 침묵 속에서 지내고 계신 95세의 할머니였다. ‘노인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은 이 할머니는 약물처치 등의 치료에도 전혀 반응이 없는 분으로 그분의 담당 간호사는 내가 그 할머니와 대화를 할 수 있으리란 기대 없이 단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도움 되는 어떤 놀이를 해 주기를 원했다.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유리구슬이 가득 담긴 큰 바구니를 하나 주면서 할머니와 구슬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한 시간 동안 할머니와 함께하고 나서 그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솔직히 나는 이 할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95세라는 엄청난 나이와 ‘노인성 치매’라는 병명이 주는 선입견에 겁이 났다. 두려운 마음으로 할머니 방을 노크했다. 아무런 기척이 없어 가만히 방문을 열어 보니 작은 방의 창문 앞에는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햇빛이 쏟아지는 의자에 앉은 할머니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온 것을 할머니가 알아보기만을 기다렸지만, 할머니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았다. 유리구슬이 든 바구니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나도 가만히 침묵 속에 있었다.

말을 건넨다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적만이 가득했다. 나는 어떻게든 첫 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싶었으나 어떤 방법도 지금 이 할머니에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계속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서 겨우 옆모습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연수 때 배운 갖가지 대화 방법들은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할머니와의 대화를 완전히 포기하고 유리구슬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그 옆에 가만히 앉아서 한 시간을 보냈다. 참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오전 면담이 끝났음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나는 천천히 바구니를 챙겨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방을 나가려던 순간 호기심이 발동해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무엇을 그렇게 바라보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실수임을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환자의 개인 생활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엄격한 금지사항이었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못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그러나 할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지금 빛을 바라보고 있단다.” 할머니의 그 얼굴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소아과 의사가 된 나는 그 할머니와 같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빛을 바라보는 모습을 가끔 신생아들에게서 보았다. 그때의 아기들은 마치 신비로운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95세였던 할머니는 어쩌면 뇌가 손상되었거나 정신이상으로 말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이미 삶과 죽음의 공간을 물러나서 다가올 어떤 세계에 대한 관상을 하면서 그곳으로 향하는 빛을 따라가기 위한 여정을 인내로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할머니와의 만남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큰 은총으로 여겨진다. 그날 할머니와의 침묵 안에서 처음으로 침묵의 소중함을 알았고,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배웠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배워 가며 살고 있다.

-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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